어느 날 서른 살 쯤의 여성 변호사를 만났다. 그녀는 노숙자들을 위해 일해보고 싶다고 희망하면서 선배변호사들에게 의논을 하러 온 것이다.
“지금의 로펌에서 도저히 기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왜요?”
내가 물었다.
“저작권사건을 많이 하는데 적발해서 내용증명 보내고 소송한다고 겁을 주고 합의명목으로 돈을 뜯는 일을 합니다. 저작권을 전혀 모르고 남의 간판이 멋있어 보여 그걸 비슷하게 베껴 식당 간판을 만든 영세한 음식점 주인들에게까지 내용증명을 보내 겁을 주는 거예요. 일부러 소송청구액을 높여 공포에 떨게 하고 봐주는 척 하면서 돈을 받아내 협회와 나누어 먹는 거죠. 공갈범 같아요.‘이건 아닌데’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요.”
토스토엡스키는 변호사를 ‘고용된 양심’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나쁜 변호사는 식인 물고기 ‘피라니아’같았다. 먹이만 보이면 떼를 지어 달려들어 다 뜯어먹는다. 그런 변호사들이 매년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어떤 때 살아있다고 느낍니까?”
“일주일에 한번씩 탈북청소년 한 아이를 맡아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있어요. 돈 버는 일은 아니지만 진정으로 남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데서 제가 오히려 구원을 받는 느낌입니다.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탈북자들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죠?”
내가 물었다.
“우리사회가 통일을 부르짖는데 탈북해서 여기 와 있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이미 ‘와 있는 통일’이잖아요? 그들을 잘해주지 않으면서 통일을 얘기하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서울 정도로 핵심을 꿰뚫은 답변이었다.
“왜 변호사가 됐습니까?”
“저를 변호사로 만든 하나님께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고 슬픈 자를 위로하라고 하셨어요.”
작달막한 그녀의 마음속에 어떤 강한 존재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노숙자들을 변호하겠다고 했다.
“노숙자들의 냄새를 견딜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살았을 때 말이 떠오른다. 평생을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한여름 사람에게서 나는 악취를 견딜 수 없더라고 솔직히 고백했었다.
“할 수 있습니다.”
여성변호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굶은 짐승같이 탐욕적인 눈길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데요”
“저는 그런 가장 고통 받는 곳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믿습니다.”
신념에 찬 눈빛이었다.
“변호사의 본질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공감을 할 때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에서 행동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여성변호사는 감상이나 공허한 관념으로 말하는 건 아니었다.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는 성녀 같았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그녀는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는 성녀 같았다. 이제 그녀는 횃불이 되어 이 사회의 어둠을 밀어낼 것 같았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