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닥터스 정근 이사장이 펴낸 ‘왜 못해?, 하면 되지!’의 표지 모습.
[부산=일요신문] 하용성 기자 = ‘영화의 장면이 바뀌듯 구호현장은 또 다른 현실이었고, 한 사람이라도 더 치료하기 위해 치열하게 촌각을 다투었던 현장이었기에 유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의사로서 아내는 당시 미국에서 연수 중이었는데, 훗날 서랍장에서 그 유서를 발견하고는 죽음의 땅으로 의료봉사를 떠난 남편 생각에 가슴이 메여 펑펑 울었다고 한다.’ (책 148페이지, 유서일화 중에서)
봉사를 위한 발걸음이 지구를 열 바퀴쯤 돌았을 것이라는 ‘봉사왕’ 그린닥터스재단 정근 이사장이 목숨이 위태로운 재난현장에 남긴 그의 족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책을 펴냈다.
그의 책 <왜 못해? 하면 되지!>는 ‘꿈을 꾸면 꿈처럼 이루어집니다’라는 부제처럼 꿈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초 긍정리더십을 담고 있다.
리더십, 봉사, 신앙, 인품 등 모두 4개의 장으로 엮인 정근 이사장의 책을 펼치면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우유죽을 죽을 먹으려고 눈을 뜨자마자 학교로 달려가던 일곱 살 개구쟁이 정근을 만난다.
늘 밝은 모습에 귀티 흐르는 그를 금수저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겐 놀라운 반전이다. 빼빼 마른 몸이 부끄러웠고 결핵 때문에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어야 했던 가난하고 병약한 고교생 정근을 대할 때면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부산 유학시절 리어카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낑낑대며 산복도로를 오르내렸던 청년 정근, 무슨 일이든 맡으면 척척 해내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의대생 정근, 조직 개혁에 앞장섰던 교수 정근, 지진 등 세계 재난현장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린닥터스의 리더이자 참 의료인 정근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책에는 어떤 재벌의 비밀스러운 사연도 담겼다. 안과전공의 시절 그는 울산혜성병원에 파견됐다. 그곳에서 그는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을 만났다. 젊은 수행비서 한 명만 데리고, 줄 서서 진료를 기다리던 정주영 회장의 소탈한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정주영 회장은 악수를 하고 진료실을 나가셨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진료하면서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한국 최고의 갑부가 진료의사를 미리 대기시키지도 않고 혼자 털레털레 걸어와서 진료 받고는 의사에게 인사도 잊지 않다니! 대단히 소탈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책 18페이지 중)
녹내장 때문에 한쪽 눈이 실명인 채로 젊은 직원들과 어울려 축구까지 즐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이미 대한민국의 거인이었다.
제2장 봉사 편은 파키스탄, 스리랑카, 미얀마, 인도네시아, 네팔 등 지진 재난현장에서 목숨 걸고 펼친 그의 봉사 땀방울들이 질펀하게 배어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스리랑카) 골시티의 상황은 참혹했다. 한마디로 거대한 쓰레기도시 같았다. 해변은 무너진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서 바닷물이 닿는 부분은 잿빛을 띠었고, 육지로 밀려올라온 수십 척의 배들이 쓰레기와 뒤엉켜 있었다. 마을은 폐허로 변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원과 학교, 교회 건물에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다.’(책 134페이지 중)
아수라 현장에서 쉼 없이 진료에 매달렸다. 그마저 부족할 때면 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나님! 한순간에 집과 가족을 잃고 아파하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나이다. 이들의 아픈 마음과 몸을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도록 저희에게 힘을 주시고, 이들에게 닥친 시련과 역경을 딛고 삶의 희망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이들을 도와주소서.’(책 135페이지)
지진 구조현장의 그린닥터스 모습은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됐던 TV드라마 ‘태양의 후예’ 속 의사 강모연을 떠올리면 틀리지 않다.
‘봉사왕’ 정근 박사는 초 긍정마인드로 무장한 ‘꿈 전도사’로도 불린다. 중고교생들로 이뤄진 주니어 그린닥터스 회원들과 학부모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이렇게 강조한다.
‘아이들에게 힘든 봉사를 하게 하세요. 요즘 청소년들은 봉사를 입시 스펙 쌓기 정도로 인식하고 있어요.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죠. 대충 봉사시간이나 때우고 보자는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이 적지 않아요. 봉사의 참맛은 힘든 일에서 얻어집니다.’(책 276페이지 중)
그는 자신이 직접 설립한 국제의료봉사단체인 그린닥터스를 시대정신화 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국가·인종·종교·정치를 초월한 인류애의 실천이 그린닥터스의 핵심가치다.
‘인류애를 실천하다’는 말 대신에 ‘그린닥터스하다’라는 단어가 SNS를 통해 전 지구상으로 퍼져 나갈 때까지 봉사를 향한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각오다.
1960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정근 박사는 진주고와 부산대 의대를 졸업하고 부산대병원 안과교수를 거쳤다. 의사이면서도 의료경영 능력이 탁월한 그는 정근안과병원과 온종합병원을 개원했다.
국제의료봉사 단체인 그린닥터스 재단을 직접 설립해 자연재난 구호활동은 물론 가난한 동남아시아 국가에 정기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북한 개성공단에서도 8년 동안 남북협력병원을 운영하면서 북한 근로자 35만 명을 무료 진료하기도 했다.
‘꿈 전도사’란 수식어에 어울리게 책 말미에 ‘꿈을 꾸면 꿈같은 일이 꿈처럼 이루어진다’는 어록을 남긴 정근 박사는 이 책의 판매수익금을 청소년들의 꿈을 응원하고 어르신들의 건강복지 증진을 위해 그린닥터스 재단과 사단법인 한국건강대학에 기부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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