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태조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경기전은 전주 전통문화 의 중심이다. 아래는 남대문을 빼닮은 풍남문 | ||
그렇다. 속도가 문제가 아니고 부가 문제가 아니다. 나아가는 것도 좋지만 더이상 내 것, 내 고향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더구나 그것이 세계속에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담에야.
세계 어디를 가든 그 나라와 그 마을의 고유한 문화가 자랑거리다. 제 것의 소중함을 알고 지키는 지혜야말로 진정 개화된 사람들이 중시하는 미덕이다.
민족 예술의 전통과 정신이 잘 보존돼 내려오고 있는 예향 전주. 전통문화를 잘 가꾸고 발전시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얻을 만한 곳이다.
[호남제일문에 들어서니…]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라 써놓은 대형 관문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전주로 진입하는 국도상에서 만나게 되는 전주의 얼굴이다. 단조로운 슬라브지붕 대신 기와를 올린 전주톨게이트와 진입로의 호남제일문이 방문객을 들뜨게 한다.
“여기 사는 사람은 좋겠다”는 관광객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시내를 관통하는 전주천만해도 그렇다. 1급수에만 산다는 물고기 쉬리가 서식할 만큼 깨끗한 자연환경은 다른 도시들의 부러움을 살 일이고 ‘전통’이란 단어를 빼놓고는 전주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옛것을 잘 보전하고 가꾼 것이 부럽다.
영혼의 울림이라는 전주소리축제, 전주대사습놀이, 종이축제 등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전통문화 행사들이 해마다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전주를 아우르는 문화는 소릿길을 따라갈 수도 있고 후백제와 견훤의 자취를 찾을 수도 있으며 전주 한지와 인쇄문화의 발전이나 천주교 성지를 순례할 수도 있다.
▲ 한옥 8백여 채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전주한옥마을과 공예품 전시관 의 목어. 아래 오른쪽은 한옥생활체험관이다. | ||
경기전은 태종 10년(1410)에 태조 이성계의 영정(어진)을 모시기 위해 건립됐으며 사실상 전주 전통문화의 중심지로 자리해왔다.
경기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외문 중문 내문 등 삼문을 거치는데 모두 ‘동쪽으로 들어가서 서쪽으로 나온다’는 ‘동입서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태조의 영정은 본래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 영흥부터 한양, 개성, 평양, 전주, 경주 등 전국 6개 지역에 봉안했으나 임진왜란 때 건물과 함께 거의 소실됐다.
요행히 전주 경기전의 영정만이 무사한 것은 태인현에 살던 안의, 손홍록이라는 두 선비가 영정을 내장산 깊은 암자로 모셔가 숨긴 덕분이라 한다. 때문에 전란 뒤 어용전 가운데 경기전만이 유일하게 복원됐으며, 고종 때 어가봉송행렬 당시 사용됐던 가마, 향정 등도 복원시켜 놓았다.
경기전의 오른쪽으로는 한때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됐던 전주사고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역시 두 선비의 도움으로 임진왜란의 전화로부터 보존될 수 있었는데, 당시 60괘가 넘는 실록을 수레와 괘짐으로 운반했을 것을 생각해보면 단순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관리들마저 떠나버린 경기전을 찾아와 나라살림을 보존하려고 목숨까지 내건 두 선비들의 묘는 지금도 태인면에 쓸쓸히 남아있다.
전주사고로 가는 길에는 대나무숲이 아름답게 우거져 있다. <혼불>을 지은 현대 작가 최명희가 자주 산책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5월 전주 소리축제 때가 되면 경기전의 궐내에서 은은한 조명과 함께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지금도 경기전에서는 음력 9월9일 전국의 전주 이씨 3천∼4천 명이 모여 제사를 드리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도 조촐한 제를 올린다.
[전주 한복판 한옥마을]
서울에 남산한옥마을이 있듯이 전주에는 전주한옥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문화가 보존된 전통주거지역으로 경기전 객사 풍남문 오목대 등에 둘러싸인 시내 한복판 전주시 교동에 있다. 경기전에서부터 한옥마을로 들어서는 길을 태조로라 하고 태조로 양쪽으로 전주공예품전시관, 전통술박물관, 한옥생활체험관 등이 한데 모여 전통문화 체험의 거리를 이루고 있다.
‘걷고 싶은 거리’로 지정됐을 만큼 이 일대는 걸어야 제 멋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한옥마을의 전통가옥수는 국내 최대규모인 8백여 채나 된다고 하지만, 다니다보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가옥이 상당히 이색적이다. 작가 최명희의 생가와 소설 <혼불>에서도 만나게 되는 전주 최씨 종택이 이곳에 있다. 골목이나 건물 구조 등이 옛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한옥마을을 한눈에 조망하기 위해서는 오목대에 올라서는 것이 좋다. 마을 뒤쪽에 나즈막히 솟아있는 평범한 언덕을 오목대라 하는데 고려말 우왕 6년(1380년)에 이성계가 호남을 노략하던 왜군을 완파하고 돌아가던 중 이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했다고 한다. 조선 창업의 꿈과 설화가 시작된 곳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평범한 시민들의 좋은 쉼터로 자리잡고 있다.
▲ 전동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힌다. | ||
태조로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공예품전시관(063-285-0002)에는 이 지역에서 대를 물려온 장인들의 혼이 배어있는 전주한지, 전통자수, 한지부채 등의 공예품이 전시돼 있다. 주말과 휴일에는 도자공예 한지 전통자수 등을 실제 배울 수 있는 체험관이 정기적으로 운영돼 인기를 모은다. 앞마당에서는 굴렁쇠부터 투호, 재기차기 등 전통 놀이마당이 펼쳐져 아이 어른 할것 없이 줄을 선다.
전주전통술박물관(063-287-6305)에서는 술 익는 냄새가 한창이다. 이강주 등 전주의 명주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전통술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첫째, 셋째 토요일에는 방문객과 함께 술을 빚고 둘째, 넷째 토요일은 시음회를 연다. 김치를 담그는 것처럼 조상들은 집집마다 제각기 특성을 가진 술을 빚었다. 구전되는 것까지 하면 수만종의 각기 다른 술이 존재했다는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술 문화의 개략만 해도 하루해가 짧을 만큼 슬슬 흥미를 느낄 만하다.
관람객들은 ‘계영배’(誡盈杯·넘침을 경계하는 잔)라 적힌 잔에 술을 따라볼수 있다. 이 잔은 적정량을 초과하면 수압에 의해 술잔 밑으로 대부분의 술이 빠져나가게 만들어진 것으로,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이색적인 발명품이다. 술박물관에서는 3월22일 ‘맛과 멋이 있는 우리 술기행’을 계획하고 있다. 남도로 술 기행을 떠난다는 멋진 계획이다. 이밖에도 수시로 술 강좌를 열고 전통술 빚기에서부터 전통주, 맥주, 와인 등 각 분야의 술 전문가들을 초청한다.
[전통문화센터에서 소리체험]
우리의 전통 주거생활을 그대로 재현하여 체험해볼 수 있는 한옥생활체험관은 안동의 지례예술촌이나 수애당과 같은 숙박체험 장소다. 보료나 장인들의 작품을 소품으로 이용한 특실의 경우 10만원, 일반실은 4만원(1인2실 기준)을 받는데 자전거 등을 무료로 대여해주기도 한다.
월드컵 기간에는 외국인들이 주로 이용했으나 요즘은 전통 예술가들이나 문화, 교육인들이 세미나 장소로도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장작을 때는 아궁이, 벽에 걸려 있는 무 시래기, 반질거리는 장독대 등 영락없는 한옥 살림살이들에 정겨움이 묻어난다.
볼거리 마실거리가 충분했다면 이번에는 전주가 자랑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볼 차례. 전주천변에 위치한 전통문화센터(063-287-6300)가 다음 목적지다. 소리의 고장답게 매일 저녁 7시 판소리 상설공연이 열리는 곳이다.
전통음식관이 있으면 그 옆에 전통요리 체험실(토, 일요일마다 비빔밥 만들기, 떡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이 있고 전통혼례식장 옆에는 전통놀이마당이 펼쳐지는 이곳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대대로 전수하고 더욱 아름답게 가꿔온 전주인들의 정신이 그대로 느껴지는 곳이다. 길따라 한벽당에 오르면 맑은 물이 흐르는 전주천과 정면의 남고산 등이 운치있게 펼쳐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는 전동성당이나 흡사 남대문을 그대로 닮은 풍남문, 전주객사 등이 한옥지구와 함께 도보로 둘러볼 수 있는 볼거리다.
박수운 여행전문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