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을 맞은 연포해변은 한적한 여유로움이 가득하다. | ||
만리포 천리포 등 여름 한철 반짝하던 해변에서 이웃한 안면도로, 그리고 이제 다시 연포해변으로 명성의 중심이 변모해온 태안반도. 벌써 피부로 느껴지는 겨울과 함께 호젓한 멋을 더해가는 연포 해변을 돌아보자.
[영화 <바보선언> 찍은 곳]
80년대 영화 <바보선언>을 찍은 곳이라는 표지석이 모래사장 시작 즈음에 서 있는 연포해수욕장은 아무리 겨울이라곤 해도 쓸쓸하기가 그지없다. 하지만 그 쓸쓸함을 당장 메워주는 것들. 햇살을 받고 마음껏 제 빛깔을 뽐내는 잔물결과 멀리까지 빠져나간 바다를 그리워하며 온몸에 물결 무늬를 새기고 있는 모래사장, 그 위를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발로 뛰어다니는 젊음이다.
▲ (위)아래는 바지락을 캐는 아낙네의 모습. (아래)서해의 끝자락에 자리한 신진항. 유람선 관광객들로 제법 붐빈다. | ||
태안읍에서 603번 도로를 타면 연포해수욕장을 초입에 둔 근흥면에 닿는다. 여름철 피서객들로 발 디딜 틈 없던 제 모습을 까맣게 잊은 듯 시치미 뚝 떼고 휴식하는 겨울 연포를 찾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겨울 연포가 더 매력적인지 모르겠다. 겨울 햇살 가득한 모래사장에서 뛰어놀다 보면 두고 온 한시름은 다 잊고 마는 연포는 ‘따뜻한 겨울바다’다.
[태국사 보며 뱃길 찾기도]
연포해수욕장을 거쳐 바다 끝 신진항까지 가는 길은 한적하다. 하얀 눈과 추수가 끝난 쓸쓸한 논이 두고 온 도시를 잊게 한다.
낙지잡이로 유명하다는 정산포. 역시 한적한 포구인 데다 그 유명한 낙지잡이도 봄 가을엔 한밤중에 이뤄지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바닷사람들의 땀 냄새는 맡아보기 힘들다.
정산포를 나와 안흥성으로 간다. 안흥성을 만나기 직전 도로 왼편에 웅장하고 신비스런 바위가 눈에 띈다. 가까이 가서 읽어보니 ‘용문’이라고 표지판에 써 놓았다. 구렁이가 도를 닦아 용이 되어 승천한 곳이라는 내용이다.
문처럼 뚫린 바위틈으로 들어가보니 천정쪽이 뻥 뚫려 하늘이 훤하다. 용이 승천할 때 생긴 구멍이라 한다. 바위가 갈라진 틈으로 좁은 길이 난 곳을 지날 때는 으스스하다. 그 바위 위 낮은 산등성이에 태국사란 절이 있다. 백제 무왕 34년(633년)에 생긴 절이다. 절집이라고는 원통전과 살림집이 전부. 조그맣고 아늑한 절집일 뿐이지만 화장실을 지나 솔숲 위에 올라서니 앞으로 훤히 뚫린 바다가 모두 이 절의 경내처럼 여겨진다. 대단히 너른 바다를 지닌 절이다.
옛날 부근을 지나는 배들은 오똑한 바위산 위에 태국사를 길잡이 삼아 항해를 했는데, 특히 어둑해진 밤이면 절에 밝혀진 등불이 뱃사람들의 등대 구실을 톡톡히 했다고 한다.
태국사 아래로는 옛 성곽의 흔적을 따라 안흥성을 복원해 놓았는데, 갑오 농민항쟁 때 허물어진 것을 최근 되살린 것이라 한다.
안흥성을 지나면 안흥항에 닿는다. 이곳 사람들은 안흥 내항이라 부른다.
바로 앞에 신진도가 다리를 통해 연결되면서 신진항이 외항 구실을 맡은 바람에 종래의 안흥항은 내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신진도를 잇는 연륙교, 신진대교를 건너면 이제까지의 한적한 겨울바다는 간 데 없고 시끌시끌하고 제법 활기 넘치는 항구가 나온다. 식당마다 조개탕, 조개해장국 등을 주 메뉴로 내걸고 있다. 개펄이 발달돼 바지락이며 꼬막이며 피조개 등등이 많이 나오는 서해의 끝자락에 이르렀음을 실감할 수 있다.
신진항의 색다른 볼거리는 유람선을 타는 일. 유람선은 신진항을 떠나 인근의 독립문바위, 가의도, 동도, 정족도, 목개도, 사자바위, 마도 등을 관람하고 돌아온다. 이중에 가의도만 사람이 살고 나머지 섬은 무인도다.
정족도는 물개바위라고도 하는데 물개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의 무분별한 포획으로 개체수가 많이 줄었다. 물개바위에는 잠수의 명수라는 가마우지도 산다. 하늘을 나는 새인 데도 잠수를 잘하게 된 이유는 반드시 살아있는 고기만 먹는 까다로운 습성 때문이라고 한다. 유람선을 타고 돌며 섬에 있는 가마우지들을 보았으나 대부분 새끼들이다. 어미나 큰 새들은 멀리까지 사냥을 나가있기 때문이라 한다.
거인이 입을 벌리고 누운 모양의 거인바위, 사자가 앉아있는 모습을 한 사자바위가 아주 그럴듯한 모양으로 아이들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 (위)태양이 수평선에 걸리면 바다는 또한번 변신한다. 비경으로 꼽히는 안흥낙조. (아래)태국사 | ||
수많은 기암괴석 가운데서도 가장 마음을 아픈 사연을 지닌 것은 ‘여자바위’란 이름의 도초다. 섬에 살던 여자들이 기회만 되면 뭍으로 달아나려 했기 때문에 제발 여자들을 섬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제를 지내며 빌던 바위라고 한다. 옛날부터 섬 생활은 여자들을 배겨나지 못하게 했던 모양이다.
전남 여수 출생인 한창훈의 소설 <해는 뜨고 해는 지고>에, 옛적부터의 얘기는 아니지만, 섬을 떠나고 싶어하는 섬 여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카드회사 영업사원들이 섬에 들어와 섬 여자들에게 모두 신용카드를 만들게 했고, 여자들은 항구에 나가 카드를 쓰고는 덜컥 수천만원씩의 빚을 지게 된다. 그러면 여자들은 뭍에 나가 돈을 벌어오겠다며 섬을 떠나고, 얼마동안은 섬에 남은 남편에게 돈을 보내오지만, 얼마가 더 지나면 항구에서 만난 다른 남자와 카드 빚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결혼해야 한다며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내를 잃은 남편은 유산으로 받은 섬 땅을 팔아 항구에서 일하던 나이 많은 여자를 사온다. 섬의 척박하고 고된 생활을 신용카드로 단숨에 청산하고 대신 그 빚이 족쇄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동안 읽은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여자바위가 다시 그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섬 여자들의 아픔은 그 역사가 짧지 않음을 이 소리없는 바위는 온몸에 새겨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바위의 한을 뒤로 하고 배에서 내릴 때쯤 해가 수평선에 걸린다. 안흥8경 중 하나로 꼽히는 비경이다. 신진항에서 왼쪽으로 해양경찰 초소가 있는 곳을 지나 등대로 이어진 방파제가 일몰 감상의 최적지이다.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그에 따라 물도 백사장도 섬이나 산들도 모두 빨갛게 물들어버리는 안흥 낙조의 아름다움을 그 무슨 말로 전할 수 있으랴.
일몰을 감상하고 안흥항 주변이나 연포해수욕장에서 숙박을 하고 연포에서 일출을 감상한다. 연포해수욕장 바닷가에 바로 면하고 있는 연포 리조트(041-673-0506)는 창문을 열면 바로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배경을 지닌 숙박시설이다.
글=원지연 프리랜서
사진=전상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