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만 평 규모의 고창 청보리밭. 아빠의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아이의 얼굴이 마냥 해맑다. 미당시문학관(가운데)과 고창 선운사(아래). | ||
선운사는 초입부터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대웅전을 둘러싼 산비탈의 동백숲은 올려다 보이는 시선 속에 온통 꽃송이와 윤나는 잎새로만 가득하다. 동백숲 그늘을 헤집고 다니고도 싶지만 튼튼한 울타리 아래를 서성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당 서정주의 고향이자 아름다운 시들로 기억되는 선운사는 5월이 오기 직전 혹은 5월의 초입이면 꼭 한 번 찾아가고 싶은 곳이다.
가까운 고창에 대규모 보리밭도 조성되어 그 푸른 풀잎의 바다가 또 하나의 서정을 선사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선운사가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첫손에 꼽히게 된 것은 아마도 70년대에 통기타 가수 송창식이 미당의 시에 곡을 붙여 선운사를 노래한 이후가 아닌가 싶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고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그 꽃 말이에요.’
선운사 동백은 4월이 익어야 제대로 피어오른다. 2월부터 성급히 열리는 남녘의 동백에 비해 한참이나 늦다. 그래서 동백(冬柏) 아닌 춘백(春柏)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창 사람 서정주가 한날 이걸 깜박하고 춘삼월에 동백을 보러 갔더래나. 아직 때가 일러 보지 못하고 작부집에 앉아 육자배기나 한가락 뽑았다는 시가 그래서 씌어졌다.
4월 끝자락의 선운사는 동백뿐인가.
주차장부터 일주문, 선운사, 그리고 산으로 향하는 길까지 양쪽으로 늘어선 벚나무들이 이때쯤에 비로소 꽃잎을 떨구기 시작하니 선운사 가는 길은 소나기처럼 흰 꽃잎을 맞으며 가는 축복의 길이다. 화려한 벚꽃과 선운사 뒤꼍의 고아한 동백의 향연. 새 둥지를 닮은 꽃봉오리 사이를 자그마한 벌새들이 부지런 떨며 바삐 오가고 있다.
꽃이 지는 걸 보겠다고 꽃을 찾는 사람은 없겠지만 올해는 유난히 일찍 피고 지어 5월이면 떨어져 내리는 꽃송이로 누군가의 말처럼 ‘하도 슬퍼지지나’ 않을지. 송창식의 노래도, 서정주의 시구 속 육자배기 가락도, 탁배기 한 사발 안에서 휘도는 듯 봄 풍경에 취할 법도 하다.
이제 먼 길 달려온 다리에 채찍질을 더하여 선운사를 품은 산 속까지 걸어가 보자. 골짝 골짝에는 차밭 또한 많이 재배되고 있어 규모가 크진 않지만 자연스럽고 정갈한 품새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본래 옛 스님들이 수도하면서 정신을 가다듬기 위한 다도의 재료로 기르기 시작했던 것이라, 선운사의 녹차도 알아주는 전통을 갖고 있다.
차밭들을 지나 신라 진흥왕이 수도에 정진했다는 진흥굴과 높이 17m의 거대한 마애불, 여덟 가지로 소담스레 벌어진 장사송을 보면서 산책로 같은 산길을 따라 오르면 어느덧 봄빛 가득 쏟아지는 펑퍼짐한 정상에 오르게 된다. 정상이라고 하더라도 335m밖에 되지 않아 산책하듯 수월하게 오르내릴 수 있다.
미당 서정주의 시를 기념하는 시문학관은 선운리에 세워져 있어 가까운 길에 들러도 좋다.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축해 전시실과 영상실, 세미나실, 휴게실 등을 갖추었는데 특히 전시실에는 육필 원고와 사진 자료 등 미당의 손때가 묻은 유품 1만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미당 생가는 기념관 옆에 있다. 마루에라도 걸터앉아 옛 시인의 체취를 느껴볼 양이면 뒷산에서 울리는 새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어 가슴에 와닿는다.
동백이 후두둑 질 무렵이면 청보리밭이 고창 들판을 가득 메운다. 공음면 선동리에 있는 ‘학원농장’에 20만 평 가량의 청보리 푸른 물결이 하늘과 맞닿은 구릉 끝과 그 너머까지 일렁이는 장관을 볼 수 있다.
국내 최대 규모라는 이곳 보리 농원은 입하를 전후한 지금이 가장 푸른빛으로 아름답다. 한없이 따사로운 봄볕에 걸음도 하늘하늘 흔들리는데, 보릿대 꺾어 만든 보리피리에 흥얼거리는 노래까지 바람을 따라 일렁인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청보리 물결을 보자니 마음까지 덩달아 춤을 춘다.
▲ 지금 고창에선 ‘청보리밭 축제’가 한창이다. 사진은 보리찧기 체험. | ||
보릿대가 허리 높이로 자라 누렇게 익어 베어지고 나면 이곳은 메밀밭으로 바뀐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흰무리의 메밀꽃 구경까지 몇 번이고 다시 오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이 한 장의 소인 찍힌 엽서처럼 마음속에 남는다. 학원농장 063-564-9897
고창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고창IC에서 빠지자마자 삼거리에서 법성포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15번 지방도. 5분 정도 달린 뒤 다시 삼거리 갈림길에서 선운사 가는 길과 학원농장 가는 길이 갈린다.
학원농장은 무장 가는 길로 좌회전하여 공음(무장)-동호 삼거리에서 좌회전, 무장 방면 796번 지방도를 이용한 뒤 무장읍내 육거리에서 공음 방향으로 꺾어 4km.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정읍IC에서 빠져 22, 23번 국도로 고창읍에 들어가거나 백양사IC로 나와 15번 지방도로를 이용해 고창읍에 닿는 방법이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고창에서 선운사나 무장읍까지 군내버스를 이용한다. 무장읍내에서 택시는 6천원 거리다.
별미 & 숙박
선운사 관광단지에 숙박시설이 많고 방이 5개인 학원농장(063-564-9897)에서 묵을 수도 있다. 선운사 입구 풍천장어는 고창의 이름난 먹거리. 장어 중에서도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잡히는 이동시기의 풍천장어가 제일인데, 선운사 입구의 인천강에서 나는 풍천장어가 예로부터 유명하다. 요즘은 대부분 양식 장어를 쓰지만, 최근 고창군에서는 양식 장어를 6개월 이상 가두리 갯벌에 풀어 기른 반자연산 갯벌장어를 생산하고 있다. 값은 양식장어보다 다소 비싸지만 항생제나 기름기가 많이 빠져 육질이 담백하다. 고창의 또 하나 이름난 복분자주와 곁들여 먹는 맛이 좋다. 연기식당(063-564-4441)은 29년째 풍천장어를 팔고 있다. 갯벌가의 허름한 집을 몇 해 전 새로 지어놓았다. 고창읍내 천변의 조양관(508-8381)은 이름난 한정식집으로 문을 연 지 60년이 넘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