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곰배령 정상에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 (아래)노란 꽃은 개시호다. | ||
차는 굽이굽이 산길을 돌고 돌아 조심스레 달린다. 그러나 길은 도무지 끝날 줄 모른다. 바람이 너무도 세서 소도 날아간다는 쇠나드리를 지나 겨울에 눈이 쌓이면 설피를 신지 않고는 다닐 수 없다는 설피밭에 이르자 길은 맨몸으로 손님을 맞는다. 먼지가 폴폴 날리는 비포장도로. 털썩이는 차는 거북걸음이다.
고생스러운 만큼 목적지에 대한 기대도 크다. 한 10분쯤 그렇게 더 가면 ‘아름다운 숲, 생명의 숲’이라는 글자를 새긴 장승 부부가 지친 여행자를 맞는다. 인제군 기린면 진동2리. 현재로선 곰배령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다. 귀둔리 곰배골과 양양 오색초등학교에서 단목령을 거쳐 곰배령으로 오르는 두 개의 코스가 더 있지만 입산통제중이다.
차가 멈춘 곳에서 곰배령 정상까지는 약 4km. 길은 그다지 가파르거나 험하지 않다. 정돈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오솔길을 상상하면 된다. 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숲속에 드문드문 집들이 보인다. 비로소 몇해 전에야 전기가 들어왔다는 강선마을. 집은 모두 열 채. 그러나 다섯 가구만 사람이 산다. 남아 있는 주민들은 요즘 집을 헐고 산장을 짓는 게 유행이다. 농사라고 해봐야 일 년 먹거리도 안되는 그들로서는 등산객들을 상대로 민박을 치면서 수입을 잡는 게 훨씬 낫다고 판단했으리라.
▲ 곰배령 등산객들(위),1.개쑥부쟁이 2.동자꽃 3.둥근이질풀 4.흰꽃이질풀 5.수리취 | ||
30분쯤 더 오르면 오른쪽에 삼단폭포가 걸음을 잡아챈다. 폭포는 높이가 약 6m. 사람들은 그 아래 너럭바위에 앉아 발을 담그고 땀을 식힌다.
삼단폭포를 지나 돌다리를 건너자 길은 조금씩 경사를 이룬다. 나무들은 이전보다 더 우거져 하늘을 완전히 가린다. 볕이 들지 않는 짙은 나무 그늘을 온통 푸른 이끼가 뒤덮고 있다. 원시림에 온 느낌이다.
8부 능선쯤 되는 곳에 사람 키만한 주목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주목나무들은 본래 자연군락이 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묘목을 구해 심은 것이다. 애초 곰배령 정상부는 아름드리 주목나무가 군락을 이루던 곳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벌목꾼들에 의해 대부분 잘려 나갔다고 한다. 주목이 사라진 자리만큼 숲에는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뒤늦게 다른 사람들이 숲의 복원을 기원하며 키 작은 주목들을 새로 심은 것이다.
등산 초보자에게는 주목군락지께부터 마지막 20분 남짓한 구간이 고비다. 한시라도 빨리 정상에 오르고 싶은 마음에 다소 험한 이 길을 재촉하다 보면 몸이 고달프다. 급한 마음을 다스리고 쉬엄쉬엄 천천히 쉬어가야지. 길은 숨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그리고 곰배령은 조금 늦더라도 당신을 거부하지 않는다.
걷기 시작한 지 꼬박 두 시간. 시야를 가렸던 나무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등산로 옆으로 무성한 들풀과 야생화가 모습을 드러낸다. 드디어 정상, 천상의 화원 곰배령에 다다른 것이다.
초원에 오르면 등산객들은 두 번 놀란다.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에 먼저 놀라고, 그 초원을 뒤덮은 다채로운 야생화에 경탄한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에 수천평 탁 트인 초원이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등산객들은 희한하게도 이곳에선 메아리를 부르지 않는다. 곰배령 위로 점봉산(1,424m)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가. 점봉산 꼭대기에 올라서야 비로소 ‘야호’ 소리를 외치려나. 곰배령에서부터 1시간 정도 더 올라가면 점봉산 정상. 그러나 그곳은 입산통제 중. 오르려야 오를 수 없다.
곰배령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수십 종의 야생화가 철 따라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가을의 문이 막 열린 지금은 가을 꽃들의 차례. 개구릿대 고려엉겅퀴 동자꽃 둥근이질풀 수리취 조밥나물 등 이름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
등산객들은 생전 처음보는 야생화에 감탄하면서 저마다 카메라를 꺼내 그 모습을 담기에 바쁘다.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가 식물도감을 펼쳐놓고 함께 실물과 그림을 맞춰가며 이름과 설명을 찾는 모습은 이곳에선 익숙한 풍경이다. 그야말로 산교육의 현장이다.
▲ 삼거리 주막 전경(위). 왼쪽 위부터 야생화 고려엉겅퀴, 고마리, 금강초롱. | ||
곰배령에서 한참 몸을 쉬고도 등산객들은 가을하늘과 꽃과 바람에 취해 쉽게 일어서지 못한다. 꿈에서나 볼 천국의 화원에서 누가 서둘러 내려가고 싶겠는가. 저 아래 기다리는 것은 콘크리트 건물 가득한 도시의 찌든 일상 뿐인 것을.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하산길은 그래서 가볍고도 참 무겁다.
산행의 마무리는 등산로 입구 ‘곰배령 삼거리 주막’에서 즐기는 한잔의 막걸리가 제격이다. 주막이라고 하지만 특별한 안주거리는 없다. 과자 부스러기와 컵라면이 전부. 대신 술은 종류가 많다. 산에서 나는 천연 재료들로 담근 전통주들. 마가목주 당귀주 천마주 돌배술 등이 있고 2백여 가지 약초를 발효시켜 기른 효소도 판다. 모두 주인이 직접 담근 것이다. 술은 잔으로는 팔지 않지만 막걸리는 특별히 예외다.
이곳 주인 이상곤씨(47)는 곰배령이 좋아 10년 전 이곳에 아주 눌러 앉았다. 그 이전에는 8년 동안 도봉산에서 살았다고 한다. 곰배령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씨가 들려주는 ‘곰배령의 사계’를 안주삼아 마시는 막걸리 한잔에 등산으로 쌓인 피로가 싹 풀리고, 무거웠던 마음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