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운산 풍취를 즐기는 등산객들. 위 사진은 선운사 마애불 암각화(위왼쪽)와 진흥굴 입구. | ||
선운사 단풍의 정체는 사실 ‘애기단풍’이라 불리는 ‘꽃무릇’. 이 꽃은 선운사 입구서부터 산마루 도솔암까지 3km가 넘는 등산길 양 옆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선운사는 동백꽃 군락으로 유명하다. ‘바람 불어 설운 날,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동백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5월마다 선운사로 달려갔다. 송창식 노래 ‘선운사’가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서 동백꽃은 선운사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 선운사에는 봄의 동백꽃만 있는 줄 안다. 하지만 꽃무릇 피는 가을 선운사는 동백꽃 가득한 3∼4월보다 더 장관이다.
그리움에도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붉은색일 것이다. 꽃무릇은 그리움이 산화한 꽃이다.
속세의 여인이 승가의 스님을 연모하다가 맺어질 수 없는 사랑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자리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는 꽃. 이 꽃은 그 사연만큼이나 실제 모습도 애달프다. 스님과 여인이 만나지 못 하는 것처럼, 한 몸에서 나면서도 꽃과 잎은 같은 시공간에서 절대로 마주할 수 없다.
선운사 꽃무릇은 9월 초 뿌리에서 꽃대가 먼저 솟아난다. 꽃대는 40∼50cm 가량. 훤출한 꽃대 위에 피어난 꽃은 추석을 전후해 절정을 이룬다. 그리곤 운명의 장난처럼 꽃이 져야만 잎이 핀다.
꽃이 떨어진 다음에야 짙은 녹색의 잎이 열리는데, 잎의 길이는 30∼40cm. 인동초처럼 겨울을 나고 이듬해 따스한 봄 햇살을 맞으며 잎은 시든다. 잎과 꽃이 만나질 못하는 까닭에 서로를 그리워하리라는 상상에서 일명 ‘상사화(相思花)’라고도 불린다.
꽃무릇 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꽃을 만지지 마세요, 상사화가 아파요’라는 팻말이 서 있다.
▲ 선운사 대웅전 뒤편 동백꽃 군락. (아래)동백열매. | ||
꽃무릇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잎 하나 없는 가느다란 꽃대에 홀로 망울을 떠뜨린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인가. 자신의 외로움을 감추려고 꽃은 무리지어 피고, 더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다.
매표소에서부터 길 옆 개울가에 난 꽃무릇에 취해 10여 분 걷다보면 이내 선운사다. 선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의 본사. 577년(백제 위덕왕)에 검단선사가 창건한 이후 89개의 암자와 1백89채의 건물이 들어섰을 정도로 대가람이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본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탔다.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 만세루 영산전 명부전 등은 1613년(광해군 5)에 재건한 것이다.
대웅전 금동보살좌상 지장보살좌상 등 보물 5점과 육층석탑, 범종 등 문화재급 보물들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전면(前面) 5칸에는 모두 빗살 분합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건물 높이에 비해 측면으로 돌출된 분합 부분이 짧아 균형에 약간 결함이 있으나 견실하게 보인다.
선운사에 있는 불상들은 하나같이 특이하다. 머리에 두건을 쓴다거나 띠를 둘렀고, 얼굴 생김도 개성이 있다. 특히 그 중 금동보살좌상이 독특하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이 부처는 높이가 1m 정도로 크지 않은데, 얼굴이 4각형이고 살이 찐 데다가 목은 짧고 굵어서 약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아 세속에 대한 초월을 넘어서 무관심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한동안 들여다보고 있자니 평온함이 밀려온다.
선운사 대웅전 뒤 동백나무 군락은 최고 수령 6백여 년 된 동백나무 3천여 그루가 모여있다. 봄에 피어야 할 꽃이 때를 잊고 벌써 피었나? 푸른 잎 사이로 발긋한 게 촘촘히 박혀 있어 다가가 보니 열매가 열렸다.
완전히 익기 전 동백나무 열매는 그 꽃 색깔을 닮아 빨갛다. 열매는 기름을 짜서 먹기도 하고 머리에 바르기도 한다. 감기약이 귀했던 옛날, 시골에서는 아이의 기침이 오래가면 그 들큰한 동백기름을 억지로 한 숟가락씩 먹이곤 했다. 하룻밤 자고 나면 희한하게도 기침이 곧잘 멎었다.
절을 한 바퀴 둘러보고 잠시 그 앞 돌다리 난간 위에 걸터앉아 사색에 잠기던 이들은 숲으로 난 길을 따라 산으로 오른다. 자그마한 봉우리들로 점철된 선운산. 도솔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겨우 해발 336m밖에 되지 않지만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릴 만큼 경관이 아름답다.
선운사에서 출발하는 등산코스는 4가지. 코스에 따라 짧게는 왕복 3시간에서부터 길게는 10시간이 소요된다.
선운사와 산행을 함께 즐길 요량이라면 진흥굴-도솔암-마애불상-용문굴-낙조대-천마봉 코스 / 석상암-마이재-천왕봉-소리재-낙조대-천마봉 코스를 권한다. 전자는 3시간, 후자는 5시간이면 충분하다.
▲ 선운사 경내. 뒤쪽으로 대웅전과 6층석탑이 보인다. (아래)거대한 바위 위에 초석을 놓고 만든 도솔암 내원궁 | ||
도중에 만나는 진흥굴은 신라 진흥왕이 부처의 계시를 받아 의운국사를 시켜 백제 땅인 이곳에 선운사를 창건케 하고 퇴위한 후 수도했다는 곳. 깊이 10m, 폭 4m인 이 굴은 지금도 기도처로 이용되고 있다. 굴 안 작은 석불 앞에는 항상 촛불이 켜 있다.
진흥굴에서 1km 정도 더 올라가면 도솔암 내원궁이 있다. 이 암자 역시 진흥왕이 세웠다고 전한다. 하지만 지금의 건물은 조선 초기에 짓고 순조17년(1817)까지 몇 차례 보수한 것이다. 천인암이라는 기암절벽과 맑은 물이 흐르는 깊은 계곡 사이에 자리한 내원궁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한다는 지장보살을 모신 곳. 거대한 바위 위에 초석만을 세우고 만든 이 건물은 작은 규모지만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도솔암 바로 옆에 마애불이 있다. 역시 선운사의 보물 중 하나다. 폭 15m 높이 20m의 거대한 바위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불상은 양감이 도드라진 입과 파격적인 미소가 눈에 띈다.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고려 초기의 양식을 지니고 있어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등산로는 이무기가 굴을 뚫고 승천했다는 용문굴부터가 조금 가파르다. 그러나 기껏해야 천마봉까지 1km가 채 안 된다. 잠깐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자. 선운산 정상 천마봉에 오르면 기암괴석과 주변 봉우리들이 어우러진 한 폭 수묵화 같은 경치가 모든 것을 보상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