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방산에서 대정읍으로 이어진 도로변에 흐드러지게 핀 수선화가 (위) 봄을 알린다. 한라산 설경 | ||
겨우내 껴입은 순백의 외투에 아직도 솜을 덧대며 설산(雪山)의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는 한라산은 이제야 겨울 문턱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 아래로는 활짝 핀 장다리꽃이며, 수선화가 부지런히 봄의 향기를 실어 나르며 추위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지난 겨울 한라산에는 모처럼 많은 눈이 내렸다. 겨울의 끄트머리에 섰지만 눈이 녹기는커녕 요즘도 간간이 폭설이 내려 한라산의 몸집은 점점 더 불어나고 있다. 더디 가는 겨울이 등산객들에게는 반갑기만 하다. 해발 1,950m. 하얗게 눈 덮인 한반도 남녘땅 최고봉에 오른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한라산 등산은 관음사 성판악 어리목 영실 등 4개의 들목에서 시작된다. 이 중 관음사와 성판악 코스가 정상까지 가는 완주코스. 어리목과 영실코스는 해발 1,700m 고지인 윗세오름까지만 등산이 가능하다.
등산 소요시간은 코스마다 다르다. 가장 긴 관음사 코스는 왕복 10시간 이상 걸린다. 성판악 코스도 족히 9시간은 걸린다. 따라서 이 두 코스로 산행을 할 요량이라면 적어도 오전 9시 이전에는 입산을 해야 한다. 9시가 지날 경우 입산이 통제된다.
반면, 어리목코스는 왕복 4시간이면 족하다. 영실코스는 이보다 더 짧아 3시간 정도 걸린다. 이 두 코스가 시간이 덜 걸리는 이유는 출발점이 해발 1,100m 고지 지점인 데다 백록담이 아닌 윗세오름까지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코스로의 산행은 정오까지 입산하면 된다.
정상까지 이어지진 않지만 어리목, 영실 코스의 모습도 멋지다. 겨울 산행에 제법 이력이 붙은 사람이 아니라면 백록담을 보려고 욕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정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이 두 코스를 이용해 한라산에 오르기를 권한다.
어리목 코스는 1100도로변 어승생오름 북쪽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코스의 총 길이는 편도 4.7km. 어리목광장에서 출발해 사제비동산과 만세동산을 지나 윗세오름까지 나 있다.
▲ 병풍바위(왼쪽)와 1700고지 윗세오름 대피소. | ||
마치 봄날 벚꽃처럼 눈꽃이 만발한 참나무 숲길을 1시간 이상 걸어 오르면 시야를 가렸던 숲은 홀연히 사라지고 광활한 벌판이 열린다. 사제비동산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천연 썰매장 구실을 하고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물 만난 고기처럼 동산으로 뛰어 올라가 어디서 났는지 모르는 비료포대를 깔고 미끄럼을 즐긴다.
여기서부터는 산행이 그리 어렵지 않다. 경사가 완만해서 산책하는 기분마저 들 정도다. 한라산의 날씨는 아주 변덕스럽다. 화창하게 맑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을 몰고 와서 사위를 덮어버린다. 잠잠하던 바람이 갑자기 들썩거리면서 눈보라가 휘몰아치기도 한다.
사제비동산에서 10여 분을 걸어 만세동산에 이르면 한라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보이는 장구목과 오른쪽에 자리잡은 윗세오름의 세 봉우리가 호위하듯 한라산 아래로 펼쳐져 있다. 윗세오름은 ‘위에 있는 세 오름’을 뜻한다. 제주말로 오름이란 언덕, 동산 같은 곳을 뜻한다. 백록담과 가까운 쪽부터 붉은오름 누운오름 새끼오름이 있다.
정상을 오른쪽으로 비켜 30여 분 오르면 마침내 해발 1,700m 고지인 윗세오름 대피소에 이른다. 길은 여기가 끝이다. 더 오르고 싶어도 오를 수가 없다. 바로 지척에 한라산 정상이 유혹하지만 갈 수가 없다. 이곳에서 서북벽과 남벽으로 가는 등산로가 자연휴식년제 시행으로 입산이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산길은 영실 코스로 잡는다. 어리목코스보다 더 짧은 3.7km 코스다. 노루샘과 병풍바위를 지나 영실휴게소에 이르는데, 어리목 코스와는 또 다른 멋이 있다.
영실(靈室)은 신성한 곳이라는 말이니, 곧 신선이 사는 골짜기로 알려진 곳이다. 이름에 걸맞게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경승지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약 5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노루샘이 있다. 웬만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사철 물이 흐르는 곳이다. 노루샘을 지나면 구상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이 길은 20여 분 동안 이어지는데, 구상나무길이 끝나는 그 순간 등산객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바로 앞으로 영실 5백장군 바위들이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고, 거대한 절벽이 병풍처럼 가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기암절벽 뒤로는 불래오름과 산방산, 그리고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산방산 오른쪽으로 세오름 노로오름 어슬렁오름과 같은 오름들이 초경기 소녀의 젓가슴처럼 야트막하게 솟아 있다. 구름보다 더 높은 곳에서 이 모든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한라산에 사는 신선이 된 듯한 착각마저 느끼게 된다. 이렇게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 남겨두고 내려오는 발걸음은 아쉽기만 하다.
한라산은 아직 하얀 눈을 뒤집어쓴 겨울 모습이지만 그 아래는 벌써 봄이 한창이다. 장다리꽃 수선화 동백꽃이 화사하게 피어 나그네를 유혹한다.
안덕 중문 성산 등 제주도 남쪽 일대에는 유채꽃 닮은 장다리꽃이 노란물감을 풀어 놓은 듯 지천으로 피어 있다. 장다리는 무와 배추에서 돋은 꽃줄기를 말한다. 가을에 파종한 무와 배추가 모진 겨울을 이기고 새순을 키워 피워낸 것이 장다리꽃이다.
▲ 노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장다리꽃이 들판에 가득이다. | ||
수선화는 길가며 들녘을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피어 있는데, 남제주군 안덕면 산방산에서 대정읍 방면으로 이어진 도로변에 특히 많이 피어 있다.
제주의 봄은 차밭에도 내려앉았다. 짙은 녹색 차나무들이 봄과 함께 서서히 연초록 새순을 피우기 시작한 것. 무려 23만 평에 달하는 안덕면 서광다원 차밭에 돋기 시작한 새순들이 햇살에 출렁이는 모습은 ‘한없이 투명한 초록빛’이다. 한림공원과 산방산을 잇는 중산간도로에 자리잡은 서광다원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추천할 만 하다. 이곳에 녹차 박물관 ‘오설록(www.sulloc.co.kr)’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전통 다기에서부터 전세계의 다기들이 수집 전시돼 있다. 이곳 박물관 전망대에 오르면 다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리목, 영실 코스(1100도로 이용):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오전 7시50분부터 오후 3시50분까지 40분 간격 배차. 어리목 2천1백원, 영실 3천5백원
관음사, 성판악 코스(제1횡단도로 이용):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새벽 6시30분부터 밤 9시30분까지 10∼15분 간격 배차. 관음사 8백50원, 성판악 1천7백원.
▲서광다원 가는 길: 제주-95번 서부산업도로-소인국 테마파크-서광서리 삼거리 우회전
중문-12번 해안일주도로-창천 삼거리에서 우회전-16번 도로-서광서리 삼거리에서 우회전 064-794-53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