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이~야차” 입소리에 맞춰 멸치를 터는 어부들. 풍어의 기쁨이 표정에 녹아있다. | ||
서울에서 대변항이 있는 부산시 기장군까지는 꽤나 먼길이다. 경부고속도로 구서IC까지 쉼 없이 달려도 4시간30분. 다시 해운대를 거쳐 대변항까지 가는 데 1시간여가 걸린다. 못 잡아도 5시간30분은 달려야 비릿한 항구 냄새에 젖어들 수 있다. 멀고 지루한 길이지만, 풍성한 은빛에 빠져들 수 있어 행복한 여로다.
덤이지만, 덤이라고 할 수 없는 볼거리도 대변항 어귀엔 많다. 해운대에서 대변항을 거쳐 간절곶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부산 사람들이 즐겨 찾는 드라이브 코스. 볼거리에 먹을거리까지 지천이다. 대변항을 멸치의 황금어장이라고 한다면, 이 해안도로는 과연 부산권의 금싸라기 여행 코스라 할 만하다.
대변항부터 찾아보자. 대변항은 오전 10시 무렵에 찾는 것이 가장 좋다. 아침 6~8시경이 피크인 동해안의 다른 항구들과 달리 대변항의 멸치배들은 새벽 5시경 출항해 보통 오전 10시께 귀항한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멸치장이 서고 멸치털이가 시작된다.
요즘은 멸치 풍어기라 하루 두 번 출항해, 오후 4~5시경에도 멸치 후리는 작업에 빠져들 수 있다. “어이~야차~헤야차! 어이~야차~헤야차!” 6~7명이 한 조를 이뤄 멸치 터는 광경은 뭍뿐 아니라 여느 해변에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이색풍경이다.
어부들의 구성진 노동요(일명 ‘멸치 후리는 소리’)로 항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썩인다. 멸치배가 정박하는 곳은 항구의 동쪽 포구다. 갈매기들이 떼로 몰려들면 멸치배가 들어왔다는 신호로 봐도 무난할 터. 멸치 후리는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겨도 된다.
▲ 대변항의 활기찬 모습. 멸치잡이 배가 포구에 들어서면 갈매기가 먼저 알고 날개를 퍼덕인다.기장군의 또 하나의 명물 미역.(오른쪽) | ||
대변항에서 잡히는 멸치는 대부분 최대 몸길이가 15cm나 되는 왕멸치다. 주로 봄철 횟감이나 가을철 젓갈용으로 쓰이는데 지방질, 타우린이 풍부하고 요즘은 대부분 알을 가득 품고 있어 맛과 영양면에서 최고라는 평가다.
봄철이니 당연히 멸치회를 맛봐야 한다. 갈치와 마찬가지로 성질 급한 멸치는 산지에서가 아니면 싱싱한 횟감을 보기가 어렵다. 따라서 멸치회를 먹을 수 있는 곳은 멸치가 집하되는 항구뿐이다. 대변항 포구에 밀집한 횟집과 난전에서 그 특유한 멸치회를 맛볼 수 있는데, 입안 가득 퍼지는 향이 일품이다.
생멸치를 미나리 양파 양배추 풋고추 등과 함께 초고추장에 버무린 비빔회와 구이, 찌개, 전 등이 별미다.
“봄 멸치 잡수러 오이소”, “기장 맬치와 미역이 최고 아인교. 헐케(싸게) 줄테니 사가소” 불러대는 소리에 짜증이 날 만도 한데 웬일인지 이곳에선 그마저 정겹기만 하다.
멸치풍어기인 4월 말 대변항에서는 멸치축제(4.30~5.1, culture.gijang.busan.kr, 축제추진위원회 051-721-4063)도 열린다. 축제 기간 동안 풍어제, 임금님 진상행렬, 멸치 털기 체험 등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멸치와 함께 기장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특산물이 미역이다. 해운대에서 달맞이고개를 넘어 송정~대변항~간절곶으로 이어지는 해안 포구마다 미역이 지천으로 깔렸다. 멸치털이에 버금가는 진풍경이라 할 만한 미역 건조 풍경은 일광면 동백마을과 문중마을이 감상 최적지. 끝물이긴 하지만, 포구 주위에 가득한 미역들로 마을이 향기롭다.
▲ 오색연등이 매달린 장안사(왼쪽)와 노란빛이 넘실대는 간절곶 유채꽃밭. 우리나라에서 파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용궁사. 일출 장소로도 유명하다.(아래) | ||
고갯길에 있는 해월정을 넘어 길은 청사포를 지나 송정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해운대의 명성에 가려 관광객의 출입이 적지만, 부산 사람들은 오히려 송정을 즐겨찾는다. 포구에서는 미역 건조 작업이 한창이고 죽도공원에선 동백, 붉은 꽃송이가 뚝뚝 떨어져 내린다. 벌써 여름을 기대하는 낭만파들은 신발을 벗고 발목까지 바닷물에 담그기도 한다.
송정해수욕장을 벗어나면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직진하면 기장으로 향하는 대로이고, 우회전해서 바다를 끼고 돌면 짚불 곰장어 구이로 유명한 사랑리 공수마을이다.
용궁사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공수마을의 짚불구이는 볏짚을 이용, 곰장어를 구워내는 곳. 그 맛이 독특한 데다 요리법이 다양해 멸치회에 버금가는 기장의 별미로 입소문났다.
곰장어구이의 고소한 냄새를 주머니 속에 담아두고 조금 더 북진하면 해변가 절벽에 우뚝 솟은 수상 법당, 용궁사다. 우리 나라에서 파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용궁사는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주차장에서 오히려 아래로 1백8계단을 내려가야 사찰을 만날 수 있는 특이한 곳. 일출을 맞기에도 좋다.
용궁사 입구에 있는 해앙전문박물관인 수산과학관(720-2061)을 돌아 동암마을 어귀에 이르면 길은 오랑대로 접어든다. 옛날 기장에 유배된 친구를 찾아온 선비 다섯 명이 절경에 취해 술을 마시며 시를 읊고 가무를 즐겼다는 오랑대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곳. 안개가 많은 날 짙은 해무를 가르며 떠오르는 일출이 매력적이다.
대변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는 토암도자기공원에도 가보자. 토암 서타원 선생이 위암과 싸우며 공들여 만든 테라코타 ‘2002명의 합창단’이 명물. 표정 하나 하나가 저마다 기기묘묘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변항을 벗어나면 해안도로는 간절곶까지 31번 국도로 이어진다. 동백, 문중 같은 갯마을을 지나고, 고찰 장안사로 가는 길목이 되는 월내까지 지나면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나온다. 이후부터 간절곶까지는 내내 울주 땅이다.
유채꽃 한창 흐드러진 간절곶은 우리 나라에서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 하얀 등대와 어울린 바다 풍광이 그림처럼 고와 기장여행길의 마무리 코스로 제격이다.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구서IC에서 해운대방향 표지판을 따라 도시고속국도로 갈아타고 원동IC에서 내리면 해운대가 가깝다. 달맞이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송정해수욕장. 송정역을 지나 삼거리서 우회전하면 용궁사와 오랑대로 가는 해안도로를 만난다. 용궁사에서 대변항까지는 지척이다. 대변항~간절곶은 31번 국도를 타고 가다 서생면에서 간절곶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 해안도로 이용. 불안마을 어귀에서 평동으로 길을 잡으면 비학등대의 절경까지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