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랗게 이삭이 패기 시작한 논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장항선 열차. | ||
그렇다면 한번 장항선 기차를 타보면 어떨까. 노랗게 익어가는 들녘으로 유유히 달리는 기차. 남으로 내려갈수록 가을이 제 속살을 수줍게 내보인다. 그렇게 달리다 어느 이름 모를 간이역이 시선을 붙잡거든 훌쩍 내려보자. 기차여행만으로 못내 아쉽거든 금강을 넘나드는 연락선을 타고 군산으로 건너가 활기 가득한 어시장에서 한껏 물오른 가을 바다의 맛으로 여로에 피곤한 몸을 달래자.
‘회색의 도시’ 서울을 떠난 장항선 기차는 평택을 지나면서 노란 물결을 만난다. 벼이삭이 패기 시작해 더없이 풍요로운 들녘이다. 기차는 그 사이로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가을이 무르익는 장항선에는 간이역들이 조롱박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학성, 선장, 오가, 원죽, 간치, 삼산…, 그 이름도 정겹다.
장항선을 타고 가는 길은 이들 간이역이 있어서 즐겁다. 언제든 마음이 동하면 내려서 쉬다 갈 수 있는 곳. 사람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쓸쓸한 간이역이 대부분이지만, 몸과 마음이 지친 나그네에게는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정거장이다.
충남 아산시 선장역은 도고온천 바로 옆, 철길 건널목이 아름다운 간이역이다. 이곳에는 역사조차 없다.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내리는 플랫폼만 있을 뿐이다. 간이역이 생긴 지는 20여 년 됐다. 선장역은 도고온천장 때문에 생긴 역이다. 도고온천역이 있기는 하지만 위락시설들이 선장면 신성리까지 그 부피를 키우자 1982년부터 정차하기 시작했다.
선장역 철길 건널목은 한 편의 그림 같다. 2열종대로 수백m 늘어선 왕버즘나무 가로수길과 철길은 열십자를 이룬다. 딸랑거리며 기차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면 철길 건널목은 차단봉을 내리고 가로수길을 잠시 폐쇄한다. 기차가 떠나면 열리고, 또 기차가 다가오면 닫히는 가로수길. 이곳 간이역만의 풍경이다.
홍성을 지난 기차는 신성과 광천을 거쳐 원죽에 닿는다. 원죽역 또한 보잘 것 없는 간이역이다. 역시 이곳도 역사가 없다. 원죽역은 오래된 측백나무 한 그루가 역의 존망을 좌우하고 있다. 철길 바로 옆에 있는 이 나무는 희한하게도 철길과 반대편으로 15도쯤 기울어 있다. 이용객들도 거의 없어서 폐역 처리될 운명이지만 이 나무 덕분인지 사람들의 입소문에 오르내리면서 간혹 기차가 정차한다.
▲ 철길 건널목이 아름다운 ‘선장역’ | ||
그렇게 간이역을 거쳐 달려오다 보면 어느새 레일의 마침표, 충남 서천군 장항읍. 기차는 이곳에서 가쁜 숨을 고르지만, 나그네의 발품 여행은 이제부터다. 장항 읍내를 빠져나와 군산으로 가는 도선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장항역에서 도선장까지는 걸어서 10분. 도선장에서는 하루 20여 차례 군산을 오가는 연락선이 출항한다. 연락선은 기차 도착시간과 맞물려 있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 도선장으로 오면 5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
도선장에서 바라본 군산은 손에 잡힐 듯 지척이다. 충남 장항과 전북 군산을 나누는 경계는 금강이다. 군산까지는 연락선으로 겨우 7~8분 걸린다.
군산도선장은 장항과는 달리 활기가 넘친다. 장항에는 어시장이 없지만 군산에는 대규모의 어시장이 선다.
도선장에서부터 시작된 건어물전과 횟집단지, 군산수협해망동공판장까지 어시장은 1km 넘게 이어진다. 군산횟집을 비롯한 대규모의 횟집과 함께 수산물도매상 30여 개소, 건어물전문소매상 70여 개소가 있고 횟집포장마차도 20개소가 넘는다. 요즘 군산 앞바다에서 잡히는 씨알 굵은 숭어에서부터 저 멀리 무안의 세발낙지, 서해꽃게, 이제 곧 철이 오는 대하까지 입이 즐거운 골목이다.
군산은 ‘일제’의 흔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지역이다. 월명동이나 명산동, 장미동과 같은 동네에서는 일본식 건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장미동의 구 군산세관과 구 조선은행건물은 대표적인 일본식 건물이다. 그러나 관리적인 측면에서 두 건물은 명확히 구분된다. 구 군산세관의 경우 아주 깔끔히 보존된 반면, 구 조선은행 건물의 경우 을씨년스럽게 방치되다시피하고 있는 것. 이 건물에는 심지어 나이트클럽과 노래방까지 입점했던 흔적마저 그대로 남아 있다.
▲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부잔교(맨위), 일명 '뜬다리'로 불리는 데 이 다리를 이용해 전라도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날랐따고 한다. 군선 도선장 부근에는 낚시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가운데). 요즘엔 숭어의 입질이 좋다고. (맨아래) 패러글라이딩의 명소이기도 하다. 금강 | ||
장항과 군산간 바다는 금강하구둑 건설 이후 밀물 때 바닷물에 실려온 토사물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점점 메워지는 형국이다. 강물이 살아있다면 그 토사물들을 다시 바다로 밀어냈을 테지만 하구둑 때문에 강물은 갇혀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수십 년 내에 군산내항은 폐항될 가능성도 있다.
금강 하구둑 일대 전경을 조망하고 싶다면 오성산이 좋다.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산(해발 227m)이다.
오성산 정상은 백일홍이 가지마다 꽃을 피워 빨간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이곳에 서면 금강 하구둑과 지금은 이름뿐인 서포리 포구 등 금강 일대가 다 보인다. 날씨가 맑은 날 썰물 때면 낙동강 을숙도와 같은 하구언이 드러나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오성산은 패러글라이딩 명소이기도 하다. 금강 위를 날아올라 철새처럼 활공하는 그 기분,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오성산에서 금강 하구둑으로 가는 도중 만나는 작은 마을은 성덕리다. 이 마을에는 곳곳에 방죽이 있는데 연꽃이 가득이다. 그러나 그런 방죽이나 아담하니 정겨워 보이는 마을의 외양보다 더 유명한 것이 있는데, 교회 옆 방풍림이다. 방풍림이라 해봐야 논과 논 사이 둑방에 심어놓은 여남은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전부. 이 소나무는 정작 수확기의 논을 망치는 큰 바람보다 마을 처녀들의 ‘바람’을 재웠다고 한다.
예전 성덕리 ‘청춘’들의 데이트 장소 1순위는 교회. 그곳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이들이 달빛마저 부끄러워 소나무 아래로 장소를 옮겨 밀어를 나눴다고. 마을 처녀들이 딴 곳으로 눈을 돌릴 틈도 없이 사랑에 빠졌으니 성덕리 총각들로서는 소나무를 향해 큰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성덕리에서 금강 하구둑은 그리 멀지 않다.
금강 하구둑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곳. 먹잇감이 풍부한 데다 강가에 갈대가 우거져 철새서식지로는 더할 나위 없다. 겨울 동안 고니와 청둥오리, 세계적인 희귀조인 검은머리물떼새와 검은머리갈매기 등이 서식한다. 장항쪽과 군산쪽 모두 철새조망대를 갖추고 있어서 겨울철 명소가 됐다. 지금도 하구둑을 지나다보면 검은머리갈매기와 고니 등이 개펄에서 먹이를 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을 초입 장항선과 함께 한 기차여행. 아쉽게도 2008년 이후에는 장항선 기차여행이 아니라 군산선 기차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것 같다. 금강 하구둑 옆으로 철로와 역사공사가 한창인 것. 2008년이면 장항까지만 운행했던 기차는 군산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여행 안내
★교통: 서울 용산-장항 간 상하행선(기차) 하루 30여 차례 운행
★먹거리:
●‘가시리’(063-446-4613): 집된장과 군산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넣어 끓인 생선탕이 일품
●‘군산횟집’(063-442-1114)과 ‘서해횟집’(063-446-0578) 등 어느 횟집을 가든 서해의 맛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숙박: 호텔워커힐(063-453-0005), 금강 하구둑 인근이라 철새 조망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