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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0일 응원전을 펼치고 있는 이회창 후보(왼쪽)와 노무현 후보 진영. 사진=국회사진기자단 | ||
결과적으로 한나라당 이 후보만 대구경기장 스탠드에서 응원했고 김 대통령과 민주당 노 후보는 서울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한나라당-민주당이 서로 상대방의 관람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벌인 첩보전은 6·13지방선거 대결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특히 10일 대구 경기는 선거를 불과 사흘 앞두고 벌어진 데다 국민들 사이에 점증하는 반미감정, 한총련 학생들의 시위 우려, 87년 6·10항쟁 15주년 등이 겹쳐 정치지도자들이 경기장 관람을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김 대통령은 지난 4일 부산에서 열린 한국-폴란드전을 직접 관람했다. 한국이 골을 넣었을 때 빨간 모자를 흔들며 환하게 웃는 김 대통령의 모습이 TV화면에 잡혔고, 많은 국민들이 박수를 보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아들 비리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대통령이 오랜만에 환하게 웃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줬다”면서 “축구를 이기니까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도 사그라지더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청와대는 10일 대구의 한·미전에도 김 대통령의 참석을 고려했었다. 그러나 한총련 학생 수백 명이 집단으로 표를 구입해 경기장에서 반미시위를 벌인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불참을 결정했다.
실제로 한-미전을 앞둔 국내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최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된 서울 광화문 사거리는 한국-폴란드전 때보다 2∼3배 더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관측됐다.
광화문사거리에서 미국대사관은 불과 1백m. 이 때문에 서울시청과 서울경찰청은 인파를 서울시청 쪽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방안을 짜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대형 스크린 3개를 설치하고 교통을 완전히 차단한다는 결정이 나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미국대사관은 초비상 체제에 들어갔다. 대사관측은 10일 오후 휴무를 결정하고 한국정부에 대사관에 대한 특별 경비를 요청했다. 오죽했으며 허바드 주한미대사가 “차라리 미국이 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을까.
대구월드컵경기장은 서울보다 더 긴박했다. 국정원과 경찰은 정보력을 총동원, 한총련 학생들의 경기장 집단 진입을 막기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경비병력이 증원되고 경기장에 들어가는 관중들의 몸수색이 더욱 철저해졌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나라당 이 후보도 당초 대구행을 결정했다가 김 대통령의 불참 소식을 듣고 대구행을 포기했다. 그러나 민주당 노 후보가 대구에 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자 측근들이 고민에 빠졌다.
축구장 기 싸움에서 져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지난 6일과 7일 측근들은 대구행 관련 대책회의를 잇따라 가졌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일부 측근들이 대구경기장 불참을 강력히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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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4일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한국-폴란드전을 관람 하고 있다. 사진=특별취재단 | ||
한 특보는 “만약 우리나라가 질 경우, 흥분한 관중들 속에서 이 후보가 빠져나오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후보는 각국 정상이나 국제축구연맹(FIFA) 임원들이 앉는 VIP석 초대장이 없었으며, 차량 호위 등 의전도 받을 수 없는 처지라는 점도 고려됐다.
후보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이 후보는 초대장을 받았지만 ‘국회의원 이회창’ 자격으로 VIP석 바로 아래 1등석 자리를 배정받았다”면서 “미묘한 한미관계와 경기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불참 의견이 많았다”고 전했다.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초청장을 받은 민주당 노 후보 측도 대구행을 고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노 후보는 당초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수도권의 선거판세가 한나라당에 밀리고 있다는 자체분석이 나오자 급히 일정을 바꿨다. 선거 막판 수도권 유세에 노 후보를 투입해야 하는 민주당 지도부는 노 후보의 대구불참을 강력히 권고했다.
더군다나 노 후보는 대구경기 관람뿐 아니라 9일 광주방문 여부도 큰 골칫거리였다. 한 측근은 “광주지역 시민단체는 물론 광주 노사모까지 노 후보의 광주방문을 반대해 최종적으로 광주방문을 포기했다”면서 “이 같은 상황에서 한가로이 대구를 갈 수는 없었다”고 전했다.
노 후보는 대구에 가는 대신 서울 잠실 야구장에서 응원하기로 했다. 노 후보측은 응원 컨셉트를 ‘6·10항쟁 세대와 붉은 악마의 만남’으로 잡았다. 20대∼30대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노 후보가 20대 붉은악마와 30대 넥타이 부대와 함께 어깨동무를 한다는 이벤트였다.
이 때문에 노 후보는 김근태 임채정 임종석 의원 등 87년 6·10항쟁을 이끌었던 당시 국민운동본부 관계자를 대거 동참시켰다. 노 후보측의 한 관계자는 “한국이 승리할 경우 젊은층의 투표참여가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노 후보가 대구행을 포기했다는 소식이 한나라당에 전해지자 이 후보 진영에서는 대구행 강행 의견이 다시 대두됐다. 측근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최종결정은 이 후보가 내렸다. 이 후보는 8일 “대구에 갈테니 준비하라”고 비서실에 지시했다. 반대가 많았지만 이 후보의 결정을 측근들은 만류할 수가 없었다.
한편 이 후보와 노 후보가 이토록 대구경기장 관람 여부를 신중하게 선택한 배경에는 지난 4일 한국-폴란드전 때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도 한몫했다.
당시 노 후보는 부산역 광장에서, 이 후보는 해운대 백사장에서 응원했다. 전반전이 끝난 뒤 부산역 광장에서 사진기자들이 노 후보에 포즈를 취해달라며 우르르 몰려가고, 노 후보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뒤쪽에 있던 청중들 사이에서 “노무현 나가라”는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대형 스크린을 노 후보와 사진기자 일행들이 가렸다는 이유에서였다.
해운대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이 후보 일행이 사진기자들에 포즈를 취하기 위해 일어서자 일부 청중들이 뒤쪽에서 “화면이 안보인다”며 이 후보쪽으로 모래를 집어던졌다.
김 대통령, 이 후보, 노 후보 사이의 ‘축구장 표심잡기’ 경쟁은 14일 인천에서 벌어지는 한국-포르투갈전은 물론 한국이 16강에 진출할 경우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 4일 부산역 광장과 해운대에서 벌어졌던 사태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월드컵 열기에 편승해 표심을 좌우해보려는 정치지도자들의 ‘꼼수’가 한심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