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실이 한창 크고 있는 세심원 마당. 길손을 위해 준비해놓은 장독들이 이곳의 넉넉한 인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 ||
살다보면 어딘가 마음 쉴 자리 하나쯤은 마련해두고 싶을 때가 있다. 시끄러운 세상과 힘들고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혹시라도 지금 당신이 그렇다면 전남 장성으로 가보라. 그리고 세심원을 찾아보라.
세심원(洗心院), 말 그대로 풀자면 ‘마음을 씻는 집’이다. 이름부터가 심상찮은 이곳은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금곡영화촌 너머에 있다. <서편제> <태백산맥> <내 마음의 풍금> <왕초> 등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된 금곡영화촌은 1950~60년대 모습이 보존된 전통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다랑이논(계단식 논)이 펼쳐져 있고, 6개의 고인돌이 논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큰 길에서부터 자동차로 5분 넘게 들어가야 하는 심심산골이지만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유구한 역사의 마을인 것이다.
모내기가 한창인 다랑이논 사이 길을 지나 마을로 가자 당산나무가 떡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세트로 지어진 허름한 집을 비롯해 주민들이 사는 초가와 슬레이트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한창 때 80가구 넘게 살았다는 이 마을은 여느 농촌처럼 영락해 현재는 23채의 집에만 사람의 온기가 깃들어 있다. 마을 곳곳에는 당산석과 우물자리, 연자방아가 남아 있다.
세심원은 마을에서부터 1㎞가량 포장과 비포장을 반복하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타난다. 기왓장으로 울타리 담을 쌓고, 대문 문패 대신 ‘洗心院’이라고 먹물로 쓴 나무판자가 박혀 있다. 집은 평범하다. 황토벽에 까만 슬레이트지붕. 마당 안으로 들어가자 왼쪽 처마 밑에 걸린 현판으로 눈이 간다. ‘아니 온 듯 다녀 가소서’ 흘림체로 새긴 글에는 너무도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확장하자면 인생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저 이 집에 국한 시키자면 흔적을 남기지 말고 가라는 뜻이다.
10년 전쯤 장성군청 공무원이던 변동해 씨가 지은 세심원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정면으로 첩첩이 겹쳐진 산들의 능선이 파도치듯 밀려오는 듯하고 왼편에서는 대나무들이 바람의 노래를 부른다. 또한 오른쪽에서는 편백나무숲의 알싸한 향기가 퍼져 나온다. 이 멋진 자연을 자기 혼자의 것으로만 담아 두기가 아까워 변 씨는 길손을 위한 휴식처로 집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주인의 고운 마음을 안다면, 다음 사람을 위해 나의 흔적을 남기는 일 따위는 함부로 할 수 없다.
세심원의 마당은 조붓하다. 자연을 잠시 빌려 지은 집의 마당이 넓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좁은 마당이 지닌 마음만큼은 하해와 같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담은 된장은 무려 20개가 넘는 독에 가득 들어 있다. 장독대 오른쪽에는 감나무와 청매실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 또한 길손들을 위한 것이다. 현관 앞 뽕나무도 마찬가지. 주렁주렁 열린 오디는 모두 길손들의 입으로 들어간다.
집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땔감으로 마련한 장작이 수북이 쌓여 있고, 툇마루에는 책장 하나가 놓여 있다.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어 적적한 이곳. 자연스레 책으로 손이 간다.
세심원에는 널찍한 다실을 포함해 방 세 칸과 별채로 만든 황토방 두 칸이 있다. 다실에는 다기들이 깨끗이 닦여 있고 전기주전자가 놓여 있다. 세심원은 이용료가 따로 없다. 장성에서 거의 매일같이 세심원에 들러 군불을 떼고, 쌀이며 김치 등을 채워 넣는 주인은 그저 한 시간 머물다 가든, 하룻밤 묵든 세심원에서의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법이 없다. 다만 지켜야 할 철칙이 있다. 이곳에서 고기를 구워먹어서는 안 된다. 또한 사용했던 물품들은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돌려둬야 한다.
▲ (맨 위부터) 축령산 편백숲의 고즈넉한 길. 길손을 위해 개방한 세심원. 현판에 쓰인 글자의 뜻대로라면 마음을 씻는 집이다. 세심원 툇마루에는 적적할 경우 읽을 만한 책들이 꽂혀 있고, 다실에는 다기들이 깨끗이 정돈돼 있다. 영화 <내 마음의 풍금> <서편제> <태백산맥> | ||
세심원을 품은 축령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편백숲이 조림된 곳이다. 지금은 나라에서 숲을 사들여 축령산자연휴양림이라는 이름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사실 이 숲을 키운 이는 따로 있다. 바로 춘원 임종국 선생. 춘원은 1956년부터 1976년까지 20년간 숲의 조림에 매달렸다. 편백과 함께 삼나무를 쉬지 않고 심은 결과 이 숲은 국내 최대의 난대수종 조림성공지로 평가받고 있다. 2000년에는 산림청과 ‘생명의 숲가꾸기 운동본부’ 등 시민단체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휴양림의 면적은 무려 276ha(83만 평). 삼나무야 흔히 볼 수 있다지만 편백이 대량으로 조림된 곳은 극히 드물다. 편백은 흔히 ‘히노키’라고 부르는 일본 수종이다. 우리나라 토종인 측백과 달리 키가 크고 곧게 자란다. 나무의 질이 좋아 건축자재로도 가치가 높다. 편백숲은 또한 다른 숲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유의 알싸한 향기를 뿜어내 정신을 맑게 한다.
지금은 아주 잘 조림된 모습이지만 자칫 이 숲은 황폐화될 뻔했다. 이 숲에는 편백나무와 삼나무 외에도 일본 이깔나무가 산 아래쪽에 심어져 있다. 이 이깔나무는 춘원이 숲 조림을 위한 자금 충당용으로 심은 것들이다. 나무가 빨리 자라고 곧아서 전봇대 나무로 쓰였다. 하지만 전봇대들이 콘크리트로 대체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깔나무를 이용해 돈을 융통할 수 없게 되면서 1976년 이후 이 숲은 어느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했다. 적당한 간벌을 통해 숨통을 틔워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자 숲은 신음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2000년 정부가 사들이면서 숲은 극적으로 살아났다.
휴양림은 금곡마을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7㎞에 달하는 임도가 숲을 관통하고 있다. 아쉽게도 차량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차를 타고 지나며 숲을 건성으로 본다. 하지만 숲은 머무는 곳이다. 천천히 함께 하며 느끼는 곳이다. 전체 7㎞의 구간은 오르막 경사 2㎞, 평지 2㎞, 다시 대곡마을로 이어지는 내리막 3㎞ 정도로 되어 있다. 적어도 평지 구간만큼은 숲길을 걸어보자. 설렁설렁 걷더라도 왕복 2시간이면 충분한 거리, 숲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한편 숲길 중간에는 춘원의 나무가 심어져 있다. 1987년 사망한 춘원은 고향인 순창에 묻혔다가 2005년 자신이 가꾼 숲 한가운데로 사후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그가 묻힌 자리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식재되었다.
★길잡이: 호남고속국도→백양사IC→1번 국도→사가삼거리에서 우회전→장성읍 방면 직진→박산마을에서 우회전→898번 지방도→문암리에서 이정표 보고 좌회전→금곡영화촌→세심원
★먹거리: 장성에서 남도 음식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백양사에서 장성읍으로 가는 길인 수산리에 있는 한정식집 ‘풍미회관’(061-393-7744). ‘남도음식명가’ 지정 맛집이다. 꽃게찜, 도가니탕, 육회, 홍어찜과 삼합, 낙지찜, 영광굴비, 생선회 등 40가지가 넘는 먹거리들에 젓가락이 갈등할 정도. 특정식이 4인 기준 12만 원, 한정식이 8만 원이다. 1만 5000원짜리 산낙지정식에도 25가지의 반찬이 달려 나온다.
★잠자리: 세심원을 이용하고 싶다면 금곡마을 숲속미술관을 찾아가면 된다. 이곳에 열쇠를 대신 맡아 두고 있는 마을주민의 연락처가 적혀 있다. 세심원이 아니라면 백양사 인근에 ‘백양관광호텔’(061-392-0651) 등의 숙박업소가 있다. ‘방장산자연휴양림’(061-394-5523) 숲속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좋다.
★문의: 장성군청 문화관광포털(http://tour.jangseong.go.kr), 문화관광과 061-390-7224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