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운면 원촌마을에는 하늘이 흐리건 맑건 흰구름(白雲)이 항상 걸려 있다. | ||
낮보다 밝은 도시의 밤은 사람을 잠 못들게 만든다. 휘황찬란한 간판의 홍수 속에서 도시의 건물은 정체성을 잃고 간판만 공중에 떠다닌다. 각 시도에서 무질서한 간판을 정리하고 규격화하는 작업이 진행되곤 있지만, 상인들의 반대 또한 만만치 않다. 불경기에 손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바꿔 놓고 생각한다면 건물과 가게에 어울리는 간판을 찾아줌으로써 더 큰 홍보효과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진안의 원촌마을처럼.
진안에서 임실로 향하는 30번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는 원촌마을은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작은 동네였다. 진안을 찾은 사람들은 마이산으로, 구봉산으로, 운일암·반일암으로 제각기 정해진 길을 타고 다닐 뿐이었다. 원촌마을 쪽으로 길을 잡은 사람들도 대부분은 인근 백운계곡으로 성급히 떠났다. 그렇게 사람들이 찾지 않고, 또한 머무르지 않았던 이 마을에 이젠 길손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걸까.
요지부동 않는 자연이 어느 순간 용틀임을 해 기막힌 풍광을 펼쳐 보인 것도 아니고, 대나무가 마지막 꽃을 피우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간판을 새로 달았을 뿐이다.
원촌마을에서는 지난해 2월부터 ‘간판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전주대학교 엑스-에듀(X-edu)사업단이 주체가 되고, 같은 대학 도시환경미술과 이영욱 교수가 총괄기획을 맡아 5개월 동안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어떻게 이 평범한 마을이 그 대상이 됐을까.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운 좋게도 ‘무인닭집’ 간판이 교수님 눈에 띄었다”고 한다. 무인닭집 간판에는 ‘내 이름이 토종닭이네요. 바로 잡아가세요. 네’란 글씨가 씌어 있었다. 재치 있는 그 문구에 차를 세우고, ‘바로 이것’이라고 무릎을 친 이 교수는 팀을 꾸리고 존재감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던 원촌마을에 간판작업을 제안했다. 주민들과의 부침도 적지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호응을 하는 이들이 많아 프로젝트는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다.
간판의 힘에 대해 프로젝트팀으로부터 ‘강의’를 받다시피 했지만 긴가민가했던 마을 주민들. 그런데 정말로 조용했던 마을이 간판을 바꿔 단 이후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길을 달리던 사람들이 간판을 보고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주민들과 말을 섞고, 물건을 사고, 밥을 먹고…. 어느덧 원촌마을은 여행자들에게 정거장이 되었고, 명물이 되었다.
▲ 위부터 씨 없는 곶감으로 유명한 정천면 마조마을, 이색적인 백운농기계수리센터 간판, 바위 틈에 지은 정자 ‘수선루’. | ||
간혹 대광만물상회처럼 가게 이름과 어울리는 문구를 걸어놓기도 하는데 전혀 통일성을 해치지 않는다. 이 가게는 ‘무엇이든지 문의하십시오’라고 문구를 적었다. 만물상답다. 마을에는 우체국이 하나 있는데 이곳의 간판은 따로 달지 않았다. 우체국 고유의 빨간 간판이 있기 때문이다. 대신 마치 편지봉투에 찍힌 것처럼 우체국 옆 담벼락에 ‘진안백운’이라는 소인이 찍혀 있다. 기발하다.
원촌정육점은 이름 옆에 돼지가 그려져 있고, 뉴상설신발가게에는 구두와 운동화 그림이 소박한 간판의 여백을 채우고 있다. 백운약방에는 흰 구름이 그려져 있는데 누가 모를까봐 ‘흰 구름’이라고 곁에 적어놓았다. 풍년떡방앗간에는 익어가는 오곡 그림이, 행운떡방앗간에는 ‘돈 많이 벌라는 듯’ 옛날 주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근대화상회는 나무간판을 달지 않았다. 건물의 흰 벽에다 가게 이름을 그냥 적었다. 갈라진 벽이 세월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그림이 된다. 찬찬히 살펴보니 간판이 다들 예술이다. 마을에 들른 길손들은 거리의 간판을 보면서 저마다 추억에 젖는다.
밤이 되면 간판은 마을과 함께 잠든다. 결코 밤을 이기려 들지 않는다. 간판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지만, 그래도 읽을 수는 있다. 가로등빛 아래서, 달빛 아래서 간판은 조용히 제 역할을 한다.
저녁 무렵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어쩐지 ‘육번집’에는 꼭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덕태상회, 대광철물과 한 지붕으로 덮여 있는 육번집은 30여년 동안 국밥과 홍어찜 등을 팔아왔다. 예전 전화번호 끝자리가 육번이라 육번집이다. 마을이 조용해지는 저녁에도 이곳에서는 정겨운 손님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온다. 마을에 들렀다가 이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선 사람들은 막걸리를 치면서 아련한 향수에 젖는다.
이 계절에는 원촌마을 여행길에 들러볼 만한 곳들이 진안 곳곳에 있다. 정천면에 자리한 마조·학동마을도 그중 하나다. 씨 없는 곶감으로 유명한 마을들이다. 이들 마을에 가면 집집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들을 볼 수 있다. 특히 마조마을은 산세가 깊고 옛집이 많아 풍경이 더욱 정겹다.
수선루와 영모정도 찾아보길 권한다. 수선루는 마령면 월운마을 인근에 있다. 섬진강을 따라 비포장도로로 500m가량 올라가면 수선루가 나온다. 조선 숙종 12년(1686년) 연안 송씨 4형제가 조상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2층 건물인데 특이하게도 동굴 같은 바위틈에 건물이 지어져 있다. 건물 중 밖으로 나와 있는 쪽은 정면뿐이다.
영묘정은 원촌마을과 가까운 백운면 노촌리에 있다. 계곡가에 정자 하나가 고고히 앉아 있다. 고종 6년(1869년) 효자 신의연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요즘 이 주변은 단풍과 낙엽이 아주 좋다.
★먹거리: 원촌리에 음식점들이 있다. 중국집 양자강(063-432-3019)에서는 본분(?)을 잊고 겨울 별미로 사골 떡만두국을 내놓는다고 떡하니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있다. 우리회관(432-3332)은 통김치양푼찌개와 청국장이 맛있다. 길 안쪽 마을에는 육번집(061-432-4512)에서는 홍어탕과 아구탕, 돼지국밥을 잘 한다.
★잠자리: 원촌마을 인근 신암리에 백운산촌마을(063-432-5188), 큰바위팬션(063-433-4978) 등이 있다.
★문의: 진안군청(http://jinan.jeonbuk.kr) 문화관광과 063-430-2227, 백운면사무소 063-430-2606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