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정사 | ||
아마도 그가 이 길을 걸었다면 행복에 겨워 눈물이라도 흘렸으리라.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졸졸 흐르는 개울과 나란히 나 있는 좁디좁은 오대산 옛길이 바로 그 길이다. 새해의 첫머리에 고즈넉하고 정겨운 옛길을 걸으며 번잡스러운 세상사를 잠시 떨쳐보는 것은 어떨까.
옛길은 월정사 부도전을 지나 시작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월정사 전나무숲길에서부터 옛길 트래킹이 시작된다. 이 숲길은 최근 옷을 갈아입었다. 바닥을 덮고 있던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흙길로 복원한 것이다.
숲길은 월정사 입구 일주문을 지나면서 1㎞가량 이어진다. 최고 370년, 평균 수령 83년에 이르는 전나무들이 울창하게 모여 있는 숲길에 콘크리트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마사토와 황토를 배합해 평평히 다진 길은 콘크리트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 걷는 맛이 좋다. 눈이 내리면 길은 더욱 폭신해진다. 마치 매트리스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이따금 바람이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들을 쓸어내리면 길 위로 눈이 정말 눈부시게 쏟아지곤 한다.
10분쯤 천천히 이 길을 걸어가면 그 유명한 월정사가 나온다. 634년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보물 제139호로 지정된 석조보살좌상과 국보 제48호 팔각구층석탑이 있다. 특히 고려 초기에 제작된 팔각구층석탑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다각다층석탑으로 조형미가 무척 뛰어나다. 각 층의 지붕돌 여덟 귀퉁이마다 풍경이 매달려 있다.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바람의 소리를 담아내는 풍경들. 천년을 이어온 소리는 작지만 투명하다.
월정사를 나와 다시 길을 잡는다. 상원사 방면으로 난 446번 지방도는 월정사 부도군(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탑들)이 나오는 곳에서 포장이 끝난다. 그리고 비포장으로 상원사까지 길이 이어지는데 옛길은 부도군 오른쪽으로 나 있다.
월정사 부도군은 강원도문화재자료 제42호로 지정된 유물이다. 월정사에서 북쪽으로 1㎞가량 떨어진 전나무숲 가운데 자리한 이 부도군은 대부분 종 모양으로 생겼다. 원탑형 부도도 있다. 모두 22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는 1~2m로 작은 편이 아니다. 눈은 마치 하얀 대접을 엎어놓은 것처럼 부도의 머리 위에 쌓여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옛길은 이곳에서 개울 징검다리 건너 반대편에 있다. 이 길은 예전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일대의 300여 가구에 달하던 화전민들이 이용하던 길이다. 길은 이곳에서 섶다리까지 2㎞가량 나 있다. 약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러나 이 길 앞에서 시간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길에 들어온 순간 시간은 곧바로 잊혀진다. 수북이 쌓인 눈길이 미끄러워서라기보다 그 길에서 하염없이 머물고 싶기 때문이다. 인적이 거의 없는 이 길을 걷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잡다한 생각이 말끔히 정리된다.
길은 헐벗은 나무와 키 작은 산죽 사이로 나 있다. 이 계절에 길에서 특별한 볼거리를 찾을 수는 없다. 산딸기라든가 각종 들꽃도 다가올 봄을 기약하며 꼭꼭 숨었다. 오색딱따구리만 가끔씩 나타나 숲의 적막을 깨뜨린다. 길은 개울로 다가섰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치즈를 뒤집어 쓴 퐁듀처럼 새하얀 눈에 뒤덮인 개울의 바위 아래로 졸졸 상쾌한 물소리가 들린다. 옛길 트래킹은 섶다리를 만나면서 끝이 난다. 시간이야 머무는 사람 마음대로겠지만 거리가 다소 짧은 듯해 아쉽다. 그래서 섶다리를 건넌 후 상원사 방면으로 계속 길을 걷는다.
이 길에는 오대산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섶다리 건너 조금 올라가다보면 왼쪽에 있다. 오대산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을 표본으로 1603년부터 3년 동안 제작된 4부의 실록 중 하나가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실록은 1913년 일본으로 반출됐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788권의 책 중 74권만이 남았는데 2006년 8월 우리나라로 환수조치됐다. 하지만 오대산사고에서 그 실록들을 볼 수가 없다. 서울대 규장각이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대산사고를 지나 1시간 정도 더 걸으면 상원사에 닿는다. 월정사보다 약 9년 뒤 지어진 절로 오대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조망이 좋다. 상원사에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동종이 있다. 국보 제36호로 지정된 이 동종은 725년 신라 성덕왕 때 제작된 것으로 소리가 맑고 아름답다고 한다. 현재는 범종각 안에 보관되어 있다. 눈으로는 볼 수 있으나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상원사에서 30분쯤 떨어진 거리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태백산 정암사,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와 함께 5대 적멸보궁으로 불린다. 상원사까지 간 김에 내쳐 들러보면 좋을 곳이다.
오대산 옛길을 찾아갈 때는 영동고속국도 진부나들목을 이용하는 게 보통이지만 멋진 풍경을 만나고 싶다면 둔내나들목으로 나오길 권한다. 둔내에서 진부 방면으로 6번 국도가 달리는데 봉평 조금 못가 아주 멋진 ‘하늘길’이 있다. 양구두미재라고 불리는 고갯길로 뒤로는 횡성군, 앞으로는 평창군과 닿아 있다.
이 길은 태기산(1261m)의 8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데 최고 해발고도가 무려 980m에 달한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달리다보면 오른쪽으로 KT통신소가 나타난다. 이곳이 양구두미재 정상이다.
새벽에 이 길을 이용한다면 멀리 대관령을 넘어 떠오르는 해오름을 감상할 수 있고, 만약 저녁 무렵이라면 또한 횡성의 높은 산들이 빗어 내린 능선들 뒤로 멋진 해거름을 감상할 수 있다. 왼쪽 태기산 정상에는 풍력발전기들이 설치돼 있는데 그 풍경 또한 멋있다.
★길잡이: 영동고속국도 둔내나들목→6번 국도→양구두미재→봉평→진부→월정사(오대산옛길). ★먹거리: 영월의 다하누촌, 장흥의 토요시장처럼 1등급 한우를 싸게 파는 곳이 평창에도 생겼다. 횡계IC에서 용평스키장 방면으로 1㎞가량 이동하다 보면 나오는 대관령한우타운(033-332-0001)이 그곳이다. 정육코너에서 등심, 안심, 갈빗살 등 구미에 맞는 쇠고기를 구입한 후 식당 쪽에서 구워먹는다. ★잠자리: 오대산 가는 길에 휴운당(010-2946-7735)이라는 민박집이 있다. 가까운 두일리에는 시실리펜션(033-336-1612)과 미르펜션(033-335-7305)이 있다. ★문의: 평창군 문화관광포털(http://www.yes-pc.net), 문화관광과 033-330-2762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