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릉에서 남산으로 오르고 있는 등산객. | ||
신라 천년 고도 경주 남쪽에 자리한 남산은 고위봉(494m)과 금오봉(468m)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치맛주름 같은 34개의 골짜기 곳곳에 유적과 유물이 산재해 있는 ‘보물산’이다. 남산은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구분하는데 동남산 쪽이 골짜기가 깊고 산세가 가파르며, 서남산 쪽이 대체적으로 완만한 편이다. 남산에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깃든 나정과 향락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포석정을 비롯해 112개의 절터와 80기의 석불, 61기의 석탑 등 불교문화유적들이 널려 있다.
흔히 ‘경주’ 하면 불국사·석굴암·첨성대 등을 꼽지만, 사실 ‘남산’을 보지 않고 경주를 말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봄, 남산은 경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별 관심을 받지 못 하는 듯하다. 하긴 다들 꽃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남산 자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된 보물이라 한들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겠다. 그래서 더 추천한다. 남산으로의 한적한 산행을.
남산은 규모가 작은 산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크기일 뿐이다. 남산을 제대로 둘러보고자 작심한다면 2박3일도 짧다. 그 많은 유적지를 스쳐만 지나간다고 해도 1박2일은 잡아야 할 만큼 남산은 품이 넓다.
남산을 오르는 방법은 수십 가지다. 남산 아래 마을과 유적지마다 골짜기와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들이 나 있다. 그중 가장 보편적인 코스가 삼릉코스. 삼릉골로 올라 상선암-상사암-금오봉-용장사터-신선암-칠불암을 둘러보고 통일정으로 내려오는 9.5㎞의 코스다.
때론 삼릉 바로 옆에 자리한 삼불사에서 곧장 상사바위를 거쳐 금오봉으로 향하기도 한다. 삼불사는 배리삼존불이 있는 절이다. 35번 국도를 따라 삼릉 방면으로 나정과 포석정을 지나 조금 더 가다보면 왼쪽으로 삼불사가 나온다. 소나무숲 속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절 바로 옆에 배리삼존불이 있다. 보물 제63호로 지정된 세 개의 불상이다.
이 석불들은 원래 이 자리에 누워있던 것을 일으켜 세우고 10여 년 전 보호각을 씌워 비바람에 의한 마멸을 방지하고 있다. 중앙에 가장 큰 여래상이 있고, 좌우로 보살상이 서 있다. 왼쪽의 보살상이 가장 섬세한 조각을 자랑한다. 삼존불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표정들이 온화하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그 미소를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자연훼손을 막기 위해 보호각을 씌웠지만, 햇빛이 들지 않아 빛의 방향과 양에 따른 표정의 섬세한 변화를 읽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 배리삼존불 인근의 삼불사. 벚꽃과 동백이 어우러진 운치 있는 절이다. | ||
삼릉은 삼불사에서 300~400m가량 떨어져 있다. 삼릉은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의 능을 말한다. 이곳은 이 왕들의 무덤보다도 소나무숲으로 유명하다. 사진작가 배병우 씨 때문에 더 많이 알려진 곳이다. 소나무작가로 불리기도 하는 배 씨는 삼릉의 숲을 주제로 연작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뉴욕 소더비경매에서 1억 원을 호가하기도 했다. 작품 대부분은 안개에 젖은 소나무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안개가 끼는 새벽이면 삼릉으로 찾아들었다. 일교차가 큰 요즘이 안개가 무성한 계절이다.
삼릉의 소나무는 형극의 세월을 견뎌온 것처럼 곧은 게 하나도 없이 이리저리 휘어 있다. 새벽이면 차고 묵직한 안개가 소나무 숲 사이사이의 여백을 메운다. 그리고 해가 떠오르면서 그 안개는 마법처럼 삽시간에 사방으로 흩어지며 증발해버리고 만다. 안개가 물러가자 숲에는 보이지 않던 봄의 증거물이 반짝하니 드러난다. 바로 진달래다.
삼릉을 지나 소나무숲을 헤치며 남산을 오르다보면 숲 속에 진달래가 군락이 이루며 피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햇빛을 받은 진달래는 숲의 어두운 기운 속에서도 맑고 투명한 다홍색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마치 소나무들이 진달래를 호위하는 무사처럼 느껴진다.
진달래꽃의 마중을 받으며 기분 좋게 산을 오르노라면 여기저기 흩어진 불상들을 만날 수 있다. 삼릉계곡은 냉골이라고도 부르는데 남산에서 가장 많은 불상이 있는 곳이다.
가장 먼저 목이 없는 석불좌상을 만난다. 원래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이다. 불상이 무척 단정하다. 이 불상의 왼편 오솔길로 조금 가면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다시 길을 잡고 200m쯤 올라가면 이번에는 마애선각육존불상이 나타난다. 넓은 암벽에 붓으로 그린 불상그림이다. 이외에도 선각여래좌상과 석불좌상, 상선암 마애석가여래대불좌상 등의 불상들이 등산로 주변에서 걸음을 잡아끈다.
이 불상들과 잠깐 동안의 만남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기면 상사암에 닿는다. 높이 13m, 길이 25m가량 되는 주름투성이인 바위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유하고,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믿거나 말거나’다. 사람들은 상사암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자그마한 석불에 정성껏 기도를 하며 마음에 품은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상사암에서는 금오봉이 금방이다. 금오봉 정상 바로 아래에는 남산에서 가장 큰 마애불이 있다. 높이가 무려 8.6m, 폭이 4m나 되는 거대불이다. 주름의 조각이 예사롭지 않다.
칠불암을 끝으로 짧은 남산 종주가 끝난다. 내려와서는 화랑교육원 쪽으로 길이 이어지는데 그 뒤편에 자리한 불곡석불좌상도 보고 가도록 하자. 마치 할머니처럼 생겼다고 해서 ‘할매부처’로 불리기도 하는 인상적인 석불이다.
[여행안내]
★길잡이: 경부고속국도 경주IC→오릉사거리 지나 35번 국도 방면 우회전→배리삼존불→삼릉→남산
★먹거리: 보문단지 인근에 옛정한정식(054-742-6581)이 있다. 으레 한정식집이라면 부담스러운 가격을 연상할 터. 그러나 이곳은 아니다. 다양한 채소쌈과 젓갈, 꼬막무침, 더덕지 등 가짓수 많은 찬거리에도 정식 가격은 8000원. 불고기정식은 1만 2000원, 갈비찜정식은 1만 5000원이다.
★잠자리: 요즘은 벚꽃도 아름다운 시기. 보문호 주변 벚꽃이 화려하다. 이곳에 예림펜션(054-771-9049), 삼광그레이펜션(054-745-0404) 등 펜션을 비롯해 경주관광호텔(054-745-7127), 한화리조트(054-777-8900) 등 숙박시설이 많다. 보문호에서 남산까지는 삼릉 쪽으로 가든, 신선암 쪽으로 가든 30분이면 족하다.
★문의: 경주시청 문화관광포털(http://culture.gyeong ju.go.kr) 054-779-6396 경주남산연구소(http://www. kjnamsan.org) 054-771-7142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