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북미정상회담에서 어김없이 ‘인민복’을 착용하고 등장했다. 연합뉴스
[일요신문] ‘세기의 만남’이 드디어 현실로 이뤄졌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2일 오전 9시(현지시간) 손을 맞잡았다. 반세기 넘게 이어온 상호 적대국의 수장 간 첫 만남이었다. 이 만남을 앞두고 일부는 아주 사소하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한 부분에 주목했다. 바로 김정은 위원장의 ‘드레스 코드’가 그것이다. 김 위원장은 이 역사적인 만남에서도 어김없이 ‘인민복’을 착용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도대체 왜 이제는 사회주의권의 유물쯤으로 취급되는 이 촌스러운 복장을 고집하는 것일까. ‘일요신문’은 김 위원장의 드레스코드로 관심을 끌고 있는 ‘인민복’의 기원과 메시지를 자세히 살펴봤다.
#인민복? 중산복? 마오슈트? 그 기원은
서구사회에선 ‘인민복’을 ‘마오슈트(Mao suit)’라 칭한다. 인민복을 즐겨입던 마오쩌둥 전 중국 국가주석의 영향 탓이다. 중국에선 그 기원을 국부 쑨원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에선 중산복으로 칭한다.
물론 인민복이 중국에서 가장 먼저 대중화된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국부 쑨원이 개화기에 보급된 서양 직물을 편의성에 맞게 개량해 입은 것이 대중에 퍼졌기 때문이다. 해서 지금도 중국에서 인민복은 보통 ‘중산복’으로 불린다. 중산(中山)은 쑨원의 별칭이다.
중국 지도부는 그 편의성 때문에 일선 인민들에게 인민복 입기를 강권했다. 실제 인민복은 1990년대 초 중국이 본격 개방되기 전까지 중국 인민들이 널리 입었던 옷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엔 인민복을 입지 않는 사람들을 반동으로 몰아넣기까지 했으니 중국에서 그 상징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버튼을 목까지 채우고 옷깃을 가지런히 잡은 형태의 인민복 차림새는 같은 공산권인 초창기 소련은 물론 근대화 이후 일본과 심지어 우리 김구 선생 같은 비 공산권 인사들도 착용한 바 있다. 엄밀히 따지면 중국, 공산권의 유물만은 아닌 셈이다.
인민복이 특유의 편의성에 혁명성이 덧붙여진 것은 앞서 밝혔듯 중국에서의 일이다. 사족이지만, 실제 인민복은 알려진 것과 달리 그렇게 편한 옷은 아니라고 한다. 예전에 중국에선 보통 한 사람에게 인민복 두 벌을 보급했는데, 한 벌은 평시에 입고 나머지 한 벌은 예식과 같은 중요한 날을 위해 아껴둬야만 했다. 보급된 직물 원단은 통풍과 보온 모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세탁도 쉽지 않아 일상 옷으로 입기 썩 좋지 못했다고 한다.
인민해방군 행사에 인민복 차림으로 등장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연합뉴스
최근 시진핑 주석 역시 중요한 당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양복 재질의 인민복을 입고 등장해 주목받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중국에선 퇴물 취급받던 인민복이 다시금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중국을 통해 인민복은 주변 공산권 국가인 몽골, 베트남, 캄보디아 등으로 번졌다. 북한 역시 중국의 영향 속에서 자연스레 인민복이 일상화 됐다. 최고지도자 등 고위층은 물론 일선 인민들에게도 보급됐다.
#슈트빨 좋았던 김일성, 카키색 점퍼 선호했던 김정일
고 김일성 주석은 인민복보단 정장을 즐겨입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마오쩌둥 전 중국 주석, 체 게베라 전 쿠바 산업부 장관, 덩샤오핑 전 중국 주석 등과 함께한 김일성 주석의 모습.
사실 가장 선대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은 ‘인민복’을 그다지 즐기진 않았다. 물론 김 주석 역시 인민복을 입긴 했지만, 그보단 정장을 더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신의 미남형이었던 김일성 주석은 젊은 시절부터 대중 앞에 설 때, 넥타이까지 갖춘 정장 입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요즘 말로 슈트빨이 제대로 받곤 했다.
그것은 같은 사회주의 우방국 지도자들과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1969년 체 게바라 당시 쿠바 산업부 장관과의 자리에서도, 1975년 ‘마오 슈트’의 어원을 제공한 마오쩌둥 중국 주석과의 회담에서도 김일성 주석은 넥타이와 함께 정장을 고집했다.
이 뿐만 아니라 김 주석은 지난 1994년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회색 정장을 착용해 눈길을 끌었다. 김 주석은 군 최고사령관으로서의 군복도, 인민복도 아닌 다른 국가 지도자들과 별반 차이 없는 정장 차림을 즐겼다.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앙에 지퍼가 달린 점퍼 형태의 변형된 인민복을 즐겨입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고 노무현 대통령, 메드베테프 러시아 전 대통령,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한 김 위원장의 모습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선친보다 인민복을 자주 입었다. 특히 1980년 제6차 당대회나 전원회의 같은 큰 행사 때는 정장 대용으로 인민복을 주로 착용했다.
다만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후 말년에 접어들 때 즈음 김정일 위원장은 기존 인민복 보다 좀 더 편한 카키색 점퍼를 자주 착용했다. 이 차림새는 김정일 위원장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기존의 인민복 틀은 유지하되, 단추가 아닌 지퍼를 달아 편리성을 더욱 극대화한 점퍼였다.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은 물론 후진타오 전 중국 주석, 푸틴 및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등 외교석상에서도 이 같은 점퍼 형 인민복을 잘 착용했다.
#북미정상회담에서도 인민복 착용한 김정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간 ‘세기의 만남’을 앞두고 일각에서는 과연 김 위원장이 이번에도 평소 즐겨 입던 인민복을 착용할 지 여부에 관심이 모아졌다. 김 위원장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인민복을 착용했다. 이날 현지 기온은 체감온도 섭씨 40도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그의 짙은 감색 인민복은 목까지 단추가 채워져 있었다. 사실 딱 보기에도 숨일 막힐 정도로 더워보였다.
김 위원장은 이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과 두 차례의 정상회담,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의 두 차례 정상회담 등 외교 공식석상에서 모두 인민복을 착용하고 자리에 임했다. 주로 고급 양복 원단 재질로 제작된 인민복들이었다.
김 위원장은 이전 제 7차 당대회나 올 신년사 낭독 당시에는 정장 차림으로 등장한 바 있으나 그 외 대부분 공식석상에선 주로 인민복 차림새였다. 하절기 지방 및 야외 현지 실사 자리에서 이따금씩 반팔의 약식 인민복 차림이나 앞을 풀어헤친 인민복 차림으로 대중 앞에 서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선친들과 비교해서도 유독 인민복 차림을 고집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정치인들의 옷차림새는 그 하나하나가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 정치는 최근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의 경우도 각 정계 인사들이 소속 정당의 당색에 맞춰 넥타이를 매는 것이 아주 고착화 됐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012년 만경대유희장 시찰 당시 더운 날씨 덕에 인민복을 풀어헤친 모습. 조선중앙방송
인민복은 앞서 그 기원과 성격을 논했듯이, 결국 사회주의권에서 대중과 인민들의 옷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후계자로 공식화된 이후 그리고 최고지도자에 취임한 이후 줄곧 대중 친화적인 자세를 지향해 왔다. 그의 인민복 사랑 역시 이러한 대중의 시선을 지극히 의식하는 정치적 행동 중 하나로 해석된다.
김 위원장은 또한 이번 북미정상회담에서 ‘인민복’을 착용하며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로서의 대표성과 위신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사실상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개방되지 않는 사회주의권 국가이다. 적대국이면서 자본주의 국가의 거두라 할 수 있는 미국 최고지도자 앞에 선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로서 ‘사회주의’ 유산과 같은 인민복 착용은 마지막 자존심과 자긍심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의 인민복에 담긴 ‘드레스 코드’는 이처럼 대내외 양쪽의 효과를 모두 의식한 고도의 정치적 복심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