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선 지난 2월 10일 박 전 대표가 논란이 일 것을 각오하면서 이 대통령의 ‘강도론’을 맞받아친 것을 놓고 최근 흔들리고 있는 몇몇 친박 인사들에 대한 ‘경고’ 의미가 담긴 것으로도 풀이하고 있다. 일각에선 박 전 대표의 이번 내부 재정비가 세종시 정국은 물론 지방선거 및 대선까지를 염두에 둔 ‘측근 재편’의 일환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안으로 고삐를 바짝 죄기 시작한 박 전 대표의 속내가 무엇인지 따라가 봤다.
설연휴 전이던 지난 2월 11일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 몇몇 현역 의원들을 포함한 친박계 인사들이 속속 나타났다. 명절 인사차 가진 만남이었지만 분위기는 격앙돼 있었다고 한다. 당시 참석한 A 씨는 “우리 쪽의 유력한 경남지사 후보였던 김태호 현 지사와 김학송 의원이 잇달아 불출마를 선언한 것이 이슈였다. 본인들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많은 고민이 있었고, 그 과정에 여권 주류가 관여했을 것이란 얘기가 오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러한 일이 또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이에 대한 대책 등을 논의했을 뿐 아니라 우리끼리 결속을 더 다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박근혜 전 대표에게 건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귀띔했다.
비공개로 이뤄진 이들의 모임이 정치권에서 뒤늦게 회자되며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그 시기의 미묘함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2월 9일 이명박 대통령이 충북도청에서 업무보고를 받으며 꺼내든 ‘강도론’(“잘 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친다”)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작심한 듯 “집안에 있는 한 사람이 마음이 변해 강도로 돌변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발언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친이 측과 청와대는 박 전 대표 발언이 이 대통령을 향한 것이라며 분노했지만 한나라당 내부에선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란 분위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한나라당 중도성향의 한 초선 의원은 “친이뿐 아니라 친박도 박 전 대표 ‘워딩’에 담긴 정확한 뜻을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친박에게도 박 전 대표의 그러한 강경 대응은 의외였을 수 있다. 박 전 대표가 말한 ‘집안 강도’가 청와대의 주장처럼 이 대통령을 지칭한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친박 내부의 ‘적’을 겨냥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게 나를 비롯한 상당수 동료 의원들의 시각”이라고 전했다. 친박 인사들의 11일 회동에서 ‘단결’이 강조됐던 것도 박 전 대표의 이러한 의중이 반영됐을 것이란 얘기다. 참석자 A 씨는 “박 전 대표가 말한 강도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해석이 분분했던 것은 맞다”면서 “결과적으로 친박을 더욱 뭉치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정치전문가들은 박 전 대표가 내부 단속에 들어간 것에 대해 세종시 정국과 지방선거 등을 앞두고 일종의 ‘예방’ 차원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위기감’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의도의 한 정치컨설턴트는 “친이와 친박의 싸움은 상식적으로 보면 게임이 안 된다. 친이가 주류일 뿐 아니라 숫자도 많아질 이유가 없는데 그동안 박 전 대표에게 주도권을 계속 뺏겼다. 이는 친이가 정권 출범 전부터 기득권 싸움으로 세력이 나뉜 반면 친박은 단일대오를 이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친박 내부가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는 듯한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 ‘세종시 전쟁’을 앞두고 있는 박 전 대표도 이를 감지하고 계파 의원들의 고삐를 죄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친이 주류 등 여권 핵심부가 친박을 향해 ‘채찍’만 휘두르는 것은 아닌 듯하다. 세종시 수정안 처리를 위해 청와대와 당 지도부는 ‘대면 접촉’을 통한 친박 의원들 설득에 나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의원에게 입각을 보장해줬다더라” “전당대회 최고위원 지지를 약속했다더라” 등과 같은 ‘카더라 통신’이 난무하고 있는데 실제로 몇몇 친박 의원들은 친이 측으로부터 이러한 ‘당근’을 제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수도권 지역의 한 친박 의원에게 세종시 수정안을 지지해줄 경우 6월 지방선거에서 원하는 단체장 후보로 밀어줄 것이라는 제안을 했는데 솔깃해했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박 전 대표로부터 돌아서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에 대해 친박 측은 “박 전 대표가 세종시 원안에 정치인생을 걸고 있는데 웬만한 것으론 친박 의원들이 마음을 바꾸진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약점을 잡은 여권의 협박 때문일 것이다. 역대 정권들의 ‘의원 빼내기’를 답습할 경우 국민들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친이 내부에선 친박 좌장으로 꼽혀온 김무성 의원을 두고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친박 의원 중에선 유일하게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찬성 입장을 밝혀온 김 의원은 현재 친박 내에서 사실상 ‘퇴출’된 상태. 지난 18일엔 7개 독립기관을 이전하는 세종시 중재안을 제시한 뒤, 박 전 대표를 향해 “관성에 젖어 거부하지 말라”며 쓴 소리를 내뱉기도 했다. 김 의원은 다음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도 “정부 수정안에 찬성할 생각”이라고 못 박았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며 일축했다. 정치권에선 박 전 대표와 김 의원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친이계 일각에서 김 의원을 원내대표로 추대하는 방안을 다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은다. 지난해 5월에도 김 의원은 주류로부터 원내대표 출마를 권유받고 의지를 보였으나 박 전 대표 반대로 뜻을 접어야만 했다. 그 이후 둘의 갈등설은 극에 달했고 결국 이번에 사실상의 결별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김무성 원내대표’가 성사될 경우 또 다른 친박 의원들의 이탈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게 이를 주장하는 친이 인사들의 생각이다. 반면 친이 내부에선 김 의원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친박 내부의 결속이 공고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는 견해도 적지 않다고 한다.
▲ 김무성 의원이 지난 19일 국회에서 충청권 의원들과 세종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여권 주류는 정치권에서 가장 순도 높은 ‘로열티’를 자랑하는 친박의 내부 상황이 예전만 같지 않다는 것도 박 전 대표가 직접 의원들 단속에 나서게 된 배경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친박 측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똘똘 뭉쳐 있다. (내부가 흔들린다는 것은) 음해하기 위한 소리”라며 폄하하고 있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냥 한 귀로 흘리기엔 상황이 단순치 않아 보인다. 벌써부터 김무성 의원의 동조자가 나올 것이란 소문이 당 내에 파다하고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에 이어 또 다른 친박 인사가 장관에 오를 것이란 설도 들리고 있다. 또한 세종시 문제가 표결로 갈 경우 수도권의 몇몇 친박 의원들이 ‘반란표’를 던질 수도 있다는 관측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박 전 대표로서는 외부에서 침입하는 ‘강도’를 막아내기에 앞서 집안사람이 ‘강도’로 돌변하는 사태부터 막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설령 내부에서 강도가 발견되지 않더라도 ‘불상사’를 미리 차단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으니 박 전 대표에게는 ‘일석이조’인 셈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번 박 전 대표의 내부 정비를 본격적인 대권 행보의 ‘신호탄’이라고 보기도 한다. 세종시 지방선거 전당대회 등 굵직굵직한 이슈를 앞두고 믿을만하고 ‘전투력’ 있는 측근들을 골라내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 지난 2007년 경선에서 박 전 대표의 ‘복심’으로 불렸던 김재원 전 의원이 얼마 전 진행하던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정치 복귀를 모색하고 있는 것도 이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또한 박 전 대표는 경선에서 자신을 도왔던 자문 그룹 및 전략팀들과도 지난해 말부터 자주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친박계의 한 중진급 의원은 “박 전 대표는 비리가 있어 약점을 잡힌 정치인들과는 어차피 끝까지 함께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미 검증이 끝난 측근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새로운 인사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