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이야말로 ‘공정경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최우선 과제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7월 중소기업청을 중소기업벤처부로 승격해 중소기업 기술침해 근절을 위한 여러 시도에 나섰다. 하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변화는 여전히 미미하다. 특히 중소기업 관계자들이 한결같이 토로하는 문제는 기술탈취 재판 기간이 너무 긴 점이다. 일각에서는 기술에 대한 재판부와 검찰의 낮은 이해도가 재판 기간이 길어지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이 나온다.
기술탈취 여부를 판정해야 하는 재판부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정부의 기술탈취 근절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간 피해는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최근 3년 간 기술탈취를 당한 경험이 있는 지를 묻는 실태조사에서 2014년~2016년에는 78건의 피해가, 2013~2015년도에는 58건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유출로 인한 총 피해액은 2013~2015년 1097억 원에서 2014년~2016년 1022억 원으로 소폭 감소했지만 2012년~2014년 피해액인 902억 원보다는 100억 원 이상 증가했다.
대기업으로부터 기술탈취를 당한 중소기업은 회사의 생존권을 위협당하지만 그렇다고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더욱 힘든 선택이다. 수년간 이어지는 소송, 그로 인한 비용, 대기업과의 거래 단절 등으로 인해 기술탈취 소송을 제기한 중소기업들은 대개 극심한 경영난에 직면한다. 또 대기업의 자료를 얻기 힘든 중소기업이 스스로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점도 기술탈취 소송을 이어가는 데 한계로 지적된다.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이러한 대기업의 시간 끌기가 가능한 이유 중 하나가 기술에 대한 재판부와 검찰의 전문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재판부가 침해된 기술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대기업에서 전혀 다른 부분을 가지고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해달라고 하거나 불필요한 부분까지 감정을 요구하며 시간 끌기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엔지니어 A 씨는 지난해 초부터 현재까지 대기업 계열사 B 업체와 기술탈취 재판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검찰은 B 업체가 하도급 계약이 종료된 엔지니어 A 씨가 개발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복제해 공공기관에 몰래 납품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당시 검찰은 B 업체 사무실을 압수수색 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유사 프로그램을 한국저작권위원회에 감정을 의뢰했고 그 결과 ‘B 업체의 프로그램에 A 씨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 포함되었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하지만 이후 재판에서 B 업체는 공적감정 결과를 문제 삼으며 양쪽 업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전체 소스코드 비교 재감정을 요구하는 서면을 법원에 제출했고 재판부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수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A 씨는 “만약에 두 셔츠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패턴을 베꼈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고 공적감정에서 그렇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그들은 패턴, 소재, 디자인, 바느질 등 전부 비교하자고 하는 식이다. 전체 소스코드를 재감정할 경우 앞으로도 재판이 또 수년간 길어질 수 있다”며 “그들이 공적감정에 문제 삼는 부분에 대한 증거는 이미 검찰이 확보하고 있어 공개해달라고 요청했고 판사도 이를 받아들여 공개 신청을 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심지어 신청 4개월이 지나서 민사법원 판사가 독촉장을 보냈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재판부가 기술탈취 여부를 판단하는데 핵심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들이 대기업의 보복을 이유로 법원출두 증언을 꺼리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A 씨는 “하도 답답해 감정 결과에 관해 설명해 줄 모 대학 소프트웨어 감정 전문 교수를 찾아갔지만, 전에 비슷한 재판에 증인으로 참여했고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음에도 수년간 대기업과 법정 다툼에 휘말렸다고 거절했다”며 “그 교수가 말하기로는 다른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판사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하니 판사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전문배심원 참여 재판 도입이 절실하다”고 토로했다.
정부도 이런 문제를 인지하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직 실행 단계에는 못 미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지난 5월 16일 중기부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회의실에서 진행된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 테스크포스(TF) 회의’에서는 법원이 기술탈취 사건에 대해 전문성을 축적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관할집중제’ 추진 방안이 논의됐다. 현재 기술탈취 관련 형사재판은 1심은 전국 지방법원에서 2심은 전국 고등법원에서 맡고 있다. 반면 관할집중제는 고등법원 소재지 지방법원에서 1심을 특허법원에서 2심을 전담하는 제도다.
중소벤처기업부의 한 관계자는 “TF 회의 당시 기술탈취 재판 기간이 한없이 길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사건을 오랫동안 심의해 빠르게 결과를 도출하는 ‘집중심의제’도 논의되었다”며 “하지만 요즘 법원 분위기도 그렇고 사실상 아직 집중심의제와 관련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