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조심스럽게 회를 먹고 있는 정희숙에게 친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직장생활만 충실하게 했어요.”
정희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뻐진 걸 보니까 애인이 있는 것 같아.”
“아니에요. 저 애인 없어요.”
정희숙이 재빨리 거짓말을 했다. 호오 애인이 없으셔? 그러면 어떤 놈이 네 몸뚱이를 주물러 놓았단 말이야? 설마 실컷 놀아났다가 이제는 헤어졌다는 말은 아니겠지. 김영택은 정희숙에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뭔가 부탁할 일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미스 정처럼 예쁜 아가씨한데 왜 애인이 없지? 남자놈들 눈이 전부 잘못 되었나?”
“전무님, 정말 없어요.”
여자가 요물이라는 것은 이럴 때 교태를 부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총각놈들 전부 눈이 잘못되었어, 이렇게 예쁜 미스 정을 그냥 두다니.”
“전무님, 저 놀리시는 거죠?”
“아니야. 미스 정은 정말 예뻐. 내가 총각이었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프러포즈했을 거야. 술 마실 줄 알아?”
“한두 잔은 마셔요.”
한두 잔이라면 소주 한두 병은 마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자들 앙큼 떠는 거야 천하가 다 아니까.
“그럼 마셔.”
김영택은 정희숙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정희숙이 두 손으로 잔을 받은 뒤에 김영택의 잔에도 따랐다.
“전무님, 술 드셔도 괜찮아요?”
“은행 임원은 술 마시는 것도 비즈니스야. 참 미스 정은 창구에서 일하는데 술을 마셔도 괜찮아?”
은행 창구에 있는 여행원이 술을 마시면 볼만할 것이다.
“저 오늘 쉬어요.”
정희숙이 술을 마신 뒤에 말했다. 볼에 살짝 보조개가 패어 있다. 김영택이 다시 술을 따랐다. 정희숙이 다시 술잔을 비웠다.
“마음이 심란하지? 은행이 퇴출되었으니….”
김영택은 정희숙을 위로하는 시늉을 했다. 정희숙은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얼굴이 발그스레했다.
“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대리 이하는 고용승계가 될 거야. 강성노조원을 빼놓고는…. 미스 정 혹시 강성노조원이야?”
“네. 어떻게 하다가보니까 그렇게 되었어요.”
정희숙은 퇴출 반대 시위를 할 때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시위를 주도했다. 은행이 건재했을 때는 상관이 없었으나 강제 퇴출을 당하게 되자 노동조합에서 활동했던 일이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인수은행인 한양은행에서는 강성노조원들을 고용승계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상관없어. 내가 힘써 줄게.”
“사실은 그 부탁을 드리려고 왔어요.”
“그런 문제라면 진작 찾아오지.”
“고마워요, 전무님….”
정희숙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김영택에게 전화를 걸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지점에 출근해. 그러면 내가 본점으로 발령을 낼 테니까.”
“본점으로요?”
정희숙의 눈이 커졌다. 김영택은 그런 정희숙을 보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정희숙은 정장을 하고 있었으나 속에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블라우스 안에 두 개의 탱탱한 가슴이 있다고 생각하자 아랫도리로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왜 본점은 싫어?”
“아니에요. 본점에 근무하게 되면 너무 좋죠. 전무님께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요.”
“괜찮아. 내가 아무한테나 이렇게 해주는 건 아니야. 옛날에 미스 정이 나를 도와주기도 했구… 무엇보다 미스 정이 예쁘기 때문이야.”
“어머, 전무님….”
“미스 정,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까지 마신 뒤에 일어서면서 김영택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식사 중간중간에 얼굴을 떨어뜨리고 있는 정희숙의 눈가에 수심이 묻어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아니에요.”
정희숙이 어설프게 고개를 흔들었으나 강한 부정은 아니었다.
“돈 때문이야?”
정희숙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괜찮아. 나한테는 다 털어놔. 나 요즈음은 잘나가고 있어. 미스 정처럼 예쁜 아가씨가 근심에 잠겨 있는 것은 못 보겠어.”
정희숙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영택에게 차마 돈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내가 마침 갖고 있는 것이 얼마 안 돼.”
김영택은 지갑을 열어 수표 세 장을 꺼내서 정희숙의 손에 쥐어주었다. 100만 원 수표였다. 100만 원짜리 수표 세 장을 받아든 정희숙이 놀란 눈으로 김영택을 쳐다보았다. 정희숙의 눈은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에 젖어 있었다.
“미스 정은 너무 예뻐. 필요하면 더 얘기해. 계좌로 보내 줄 테니까.”
“전무님.”
“괜찮아.”
김영택은 정희숙을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허리를 쓰다듬다가 둔부를 살짝 두들겼다.
“인생은 즐거워야 돼. IMF라고 기죽어 지내지마.”
“고맙습니다. 나중에 꼭 갚을게요.”
정희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김영택은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희숙은 오히려 돈을 더 빌리게 될 것이다. 김영택은 동강에서 정희숙과 헤어져 본점 전무실로 돌아왔다. 정희숙은 내일쯤 본점으로 발령을 내고 적당한 때에 모텔로 데리고 갈 것이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비가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은행은 어수선했다. 퇴출 은행의 일부 직원들이 업무를 인수인계하지 않고 잠적한 지점도 있었고 퇴출은행 예금을 갖고 있는 시민들의 문의 전화도 빗발쳤다. 그러나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역시 힘이야.”
김영택은 창으로 번화가를 내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정권이 바뀌자 재빨리 여당에 붙어버린 것이 주효했다. 그는 한양은행의 차기 은행장이 될 것이다. 김영택이 근무하는 은행은 토지와 부동산에 대한 것과 일반 시중은행 업무를 취급했다. 정부에서 투자한 은행이기 때문에 사실상 국책은행이다. 정부가 소유한 지분이 민간에 많이 넘어갔기 때문에 절반은 민간은행이지만 아직은 정부의 입김에 의해 은행장이 결정되고 있었다.
“선배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김영택은 오후 4시가 되자 재경원에 있는 선배 최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김 전무. 뉴스에서 봤어? 바쁘지?”
최민준의 말은 은행 퇴출과 인수를 말하는 것이다. 김영택이 다니는 은행이 퇴출은행을 인수하는 것은 최민준의 입김 때문이었다.
“바쁘긴요. 비도 오는데 술 한 잔 하셔야지요?”
“술? 오늘 같은 날도 술을 마실 수 있어?”
최민준은 룸살롱을 좋아한다.
“그럼요. 모처럼 우리 둘이 호젓하게 마시죠.”
“글쎄.”
최민준이 버팅기는 시늉을 했다.
“마담이 전화를 했는데 아주 예쁜 아가씨가 새로 왔답니다.”
“그래. 비도 오는데 술이나 한 잔 하지.”
최민준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김영택이 최민준과 저녁식사를 하고 룸살롱에 도착한 것은 저녁 8시가 되었을 때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