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방경찰청이 실종된 개구리소년들의 성장한 모습을 컴퓨터로 작성해 배포한 사진. 사진=연합뉴스
부모들은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경찰에 신고했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 지방선거 투표에 경찰력이 대거 투입된 까닭에서다. 게다가 경찰은 사건 초기 이 사건을 가정불화로 인한 가출로 봤다. 결국 수사는 2개월가량 지난 뒤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지시가 있은 뒤 본격화됐다. 그나마 와룡산 일대 수색작업이 시작된 것은 실종사건 발생 7개월 뒤인 1991년 10월 중순이었다.
경찰은 물론 군까지 투입해 와룡산 일대에 대한 수색 작업이 시작됐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당시만 해도 ‘실종’ 사건이었던 터라 ‘찾기’가 핵심이었다. ‘대구 개구리소년 친구 찾기 운동’이 벌어졌고 전국새마을중앙회 등 시민단체들도 가세했다. 담배갑과 전화카드, 그리고 기업체의 각종 상품에 개구리소년들의 사진이 실렸다. 부모들도 생업을 포기하고 전단지를 들고 전국 각지를 돌았다. 당시 수색 규모인 연인원 32만 명, 국내 단일 실종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였지만 끝내 아이들은 찾지 못했다.
실종 사건이 난항에 빠져 있는 동안 각종 루머만 무성했다. ‘북한공작원 유괴설’ ‘외계인 납치설’ 등 황당한 루머가 넘쳐났고 경찰 대응은 더욱 황당했다. 한센병 환자들이 병을 고치려 아이들을 유괴한 뒤 살해했다는 루머가 제보로 들어온 것. 당연히 허위제보였지만 경찰은 1992년 8월 실제로 한센병 환자 정착촌을 강압적으로 수사한 뒤에야 그 제보가 허위임을 인정했다. 이 과정에서 한센병 정착촌 환자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개구리소년이 실종되고 5년여가 지난 1996년 1월에는 “김종식 군 아버지가 아이들을 죽여 집에 묻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게다가 이를 주장한 것은 카이스트(KAIST) 김가원 교수였다. 결국 경찰은 실종자 가족인 김종식 군의 집을 강제로 수사했다. 마당과 화장실, 부엌 바닥 등을 파냈고 심지어 구들장까지 드러냈다. 애타게 실종된 아이를 찾아다니다 유력한 용의자로 몰려 집안이 다 파헤쳐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김종식 군의 아버지는 2001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이런 주장을 펼쳤던 김가원 교수는 명예훼손으로 피소돼 벌금형을 받았다. KAIST에 사표를 제출했으며, 한국심리학회에서도 제명당했다.
이후에도 계속 개구리소년 사건을 연구한 김가원 교수는 2005년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실화소설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를 출간했고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규만 감독의 영화 ‘아이들’이 2011년 개봉됐다.
2002년 9월 26일 개구리소년 사건은 큰 변환점을 맞는다.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갔던 주민에 의해 묻혀 있던 유골이 발견된 것. 이로 인해 사건은 ‘실종’에서 ‘살해 및 암매장’으로 바뀐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무능이 또 한 번 드러난다. 실종 당시 무려 32만 명이나 동원돼 군경이 와룡산 일대를 대대적으로 수색했지만 유골은 바로 그 와룡산에서 발견됐다. 당시 대규모 수색 작업이 부실했음이 단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게다가 11년여 만에 발견된 유골과 증거품을 훼손하기까지 했다. 당시 유족들은 현장 보존이 중요한데도 경찰이 곡괭이와 삽으로 현장을 훼손했다고 반발했고 당시 언론도 경찰이 유골 발견 당시 법의학자 등 전문가의 도움 없이 현장을 파헤쳐 진상 규명을 어렵게 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나주봉 전국미아실종자가족찾기시민의모임 회장은 한 매체 인터뷰에서 “경찰이 유골 4개를 파헤쳐 놓았고 마지막 유골만 감식반이 와서 조사했다. 그때 현장 보존만 잘했으면 뭔가 단서가 나왔을 텐데…”라며 탄식했다.
개구리소년 유골과 유류품들. 사진=일요신문DB
유골이 발견되자 그날 오후 경찰은 ‘탈진과 저체온증에 의한 사고사’라고 밝혔다. 실종 사건이 사고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실종 당시 가출로 오인했던 경찰이 또 한 번 엉뚱한 결론을 추정했다. 다행히 유골 감정 결과가 타살로 나오면서 비로소 ‘살해 및 암매장 사건’이 됐다.
용의자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용의자는 유골이 발견되기 하루 전날인 2002년 9월 25일 한 신문사에 “와룡산에 큰 무덤 같은 흔적이 있는데 개구리 소년 5명의 유골이 묻혀있다”는 제보 전화를 건 인물이다. 경찰은 당시 제보전화를 걸었던 인물을 확인해서 수사를 벌였지만 횡설수설하는 정신이상자에 의한 단순 해프닝으로 조사를 종결됐다.
소설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 출간 즈음인 2005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가원 교수는 “너무 성급한 결론이었다”며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잊힌 사건인데 전남 목포에 산다는 사람이 산의 이름을 정확하게 대가며 유골 매장지를 제보할 수가 있는가.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 제보자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유골 발견 직후인 2002년 9월 30일에는 당시 구두닦이이던 한 아무개 씨가 2개월 전 한 손님에게 ‘군 생활 당시 어린이 5명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제보했다. 그 얘기를 한 남성은 3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고 한다.
제보가 접수된 2002년 9월 30일까지만 해도 개구리소년의 죽음은 ‘탈진과 저체온증에 의한 사고사’로 알려져 있었다. 경북대 법의학팀이 타살이라는 확신을 가진 시점은 10월 10일 즈음으로 경찰도 이때쯤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총기류에 의한 사망일 가능성이나 인근 군부대 사격장의 유탄에 의한 사망 가능성 등이 전혀 제기되기 전에 이런 제보가 접수됐다는 점은 상당히 눈길을 끈다. 그렇지만 이미 2개월 전에 손님에게 들었다는 얘기만으로 경찰 수사가 더 진전되기는 어려웠다.
조재진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