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J정권 시절 박지원씨는 대 언론창구 역할을 했 다. 언론사의 편의를 봐주고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 여러 차례라고 한다. | ||
그 대화채널의 축은 ‘술자리’와 ‘민원해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DJ정권과 언론과의 관계는 ‘절반의 밀월관계’였다고 표현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출범 초부터 호남 편중인사, 아들 문제 등으로 끊임없이 이슈화해서 DJ의 아픈 곳을 공략했지만 물밑으로는 나름대로 주고받기가 이뤄진 탓이다.
이 같은 절반의 밀월상태를 주도했던 인사는 바로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권력 핵심 중 유일하게 언론을 적극적으로 챙겼고 그 덕분에 거친 직설법으로 언론을 공격할 수 있는 ‘지위’를 보장받았다고 볼 수 있다.
박 전 실장은 지난 1월 말 일부 기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농반 진반을 섞어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누가 당신들에게 폭탄주를 사주겠나. 지금 많이 마셔라. 우리 정부가 물러나면 이제 당신들 돈 내고 술을 마셔야 할거다. 술 사는 사람 없으면 소주밖에 더 마시겠느냐.(중략) 옛말에 ‘있을 때 잘하라’고 했다. 내가 한 달 뒤면 물러나지만 그전까지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주저말고 부탁해라.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다.”
참석했던 기자들은 폭소를 터뜨렸지만 박 전 실장의 말을 누구도 주제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 말을 해도 될 만큼 그는 지난 5년 동안 언론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현실은 그의 ‘예언’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기자들에게 술이나 밥을 사면서 쓸데없는 얘기를 흘리고 다니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 전 실장의 시대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 인수위 시절부터 열렸다. 인수위 대변인은 김한길 전 의원이었지만 청와대 대변인으로는 박씨가 내정됐고 즉각 힘이 쏠렸다. 초유의 IMF 경제위기 속에서 심각한 재정난을 겪던 모든 언론사들은 살 길을 찾았다. 결국 새 정권의 실세로 부상한 그와 모든 어려움을 상의하며 해결책을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형편이 어렵던 한 신문사의 정치부장 A씨는 거의 매일 삼청동 인수위 사무실에 마련된 그의 방에 들렀다. A씨의 박 내정자 사무실 방문은 거의 10일 이상 계속됐다.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거액의 대출이 필요했고 박 내정자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DJ정권의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98년 말쯤 언론에 대해 뜻밖의 불평을 토로했다. “언론이 이래서야 되겠느냐. 어려울 때 아쉬운 소리를 해서 박지원 대변인이 다 들어주었는데 사소한 일만 생겨도 쌍수를 들고 일어나서 정권을 비판한다. 한 신문사는 특히 심하다. 거액의 대출을 부탁해서 곤혹감을 표시했더니 하루가 멀다하고 정부를 비판했다. 그래서 대출을 해결해주니 또 다른 건을 부탁하면서 비판기사를 쏟아냈다. 이런 식으로 세 차례를 반복했다.”
박 전 실장은 언론사의 민원만 해결해주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DJ의 언론사 행사 참석 문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광고 수주 문제까지 챙겨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실장의 한 측근은 “언론사들이 박 실장에게 부탁했던 내용들 중에는 차마 공개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다. 형편이 어려운 언론사의 부장들은 신문광고를 따오기 위해 박 전 실장의 힘을 비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언론사 차원이 아닌 기자들 개개인의 민원사항도 박 전 실장은 기꺼이 해결해주려고 노력했다. 그야말로 언론사 또는 기자들 입장에서는 ‘전방위 해결사’였다. 권력의 힘이 훨씬 막강했던 과거 어떤 정권에서도 박 전 실장처럼 언론사나 기자들의 민원을 도맡아 챙겼던 인물은 없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박 전 실장 본인도 DJ정권의 대 언론 창구라는 점을 자신의 강점으로 내세웠다. 민주당 당료 출신 또는 고향인 전남 진도의 친척들의 부탁을 철저하게 거절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언론의 부탁은 언제든지 수용할 태세가 돼 있음을 강조했다.
박 전 실장이 대 언론 채널을 장악했던 것은 경력상 자연스럽게 이뤄진 측면도 있다. 그는 97년 대선 승리 이후 DJ에게 7번 임명장을 받았다. 대통령직 인수위원, 인수위 대변인,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그리고 정책특보, 비서실장 등이다. 절반 이상이 대 언론 관계를 담당하는 직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직책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박 전 실장은 과거 어떤 정치인보다 언론의 생리에 통달해 있었다. 정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언론사나 기자들로부터 결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5년 동안 무슨 직책을 갖고 있던지 그 범주 내에 자신을 한정시키지 않았다. 정권 전반의 기류와 움직임을 스스로 취재해 필요에 따라 특정 언론사 또는 기자들에게 제공했다.
▲ 지난 2월25일 동교동 집 앞에서 퇴임축하행사를 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박지원씨(맨왼쪽). | ||
박 전 실장은 정부에게 불리한 보도가 나갈 경우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삼아 대상 언론사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DJ 가신 그룹인 동교동계가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식으로 주로 대응했던 것에 비하면 한두 수는 위였다고 볼 수 있다. 박 전 실장은 소위 ‘특종’을 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DJ에 대한 우호적 보도를 유도하는 방법도 종종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아가 권력의 은밀한 이야기도 전해줬다. 언론이 가장 궁금해하면서도 취재하기 힘든 부분을 박 전 실장은 가끔씩 흘려줌으로써 언론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 것이다. 이와 관련, 그가 비서실장으로 취임한 뒤의 한 해프닝은 흥미롭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는 묘한 소문이 돌았다. 대통령 관저에 미모의 여경찰이 근무하는데 그 여경이 DJ에게 속된 말로 ‘꼬리’를 쳐서 이희호 여사가 경질해 버렸다는 스토리였다. 언론에 보도될 성질의 내용은 아니지만 상당히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박 전 실장은 사석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자 속시원하게 해명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우리 DJ만큼 여자문제에 담백한 분이 어디 있느냐.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남아 있는 안가도 다 없애지 않았느냐. 대통령이란 자리는 때로는 조용한 곳에서 쉬면서 술도 한잔 하는 등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DJ는 일만 하는 스타일이다. 관저에 미모의 여경이 근무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고된 이유는 소문과 다르다. 문제의 여경이 아침에 술냄새를 풍기면서 근무하는 경우가 발견돼서 다른 곳으로 전출시켰을 뿐이다.”
박 전 실장의 해명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고 소문은 잠재워졌다.
박 전 실장은 민원뿐만 아니라 기자들에게 술 사고 밥 사는 것으로도 DJ정권의 ‘1인자’였다. 신문·방송사의 편집·보도국장, 정치부장, 청와대 및 민주당 출입기자는 물론이고 편집부장, 사회부장들과도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는 후문이다. 이로 인해 거의 매일 한두 차례씩 폭탄주를 마시는 게 그의 생활이었다. 박 전 실장과 친근한 일부 기자들은 술을 먹고 카드 결제를 부탁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이처럼 기자들과 열심히 술을 마신 이유는 뭔가. 당시 청와대의 한 핵심관계자는 “박 실장은 언론의 생리와 제작 메커니즘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언론사 간부나 기자들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대화함으로써 소수정권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지기반을 넓히려고 한 것이다. 그가 언론과의 긴밀한 관계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으려고 한 측면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더 큰 목적은 DJ정권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모색한 것이라고 보는 게 정당한 평가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박 전 실장은 DJ에 대한 비판적 보도에 흥분해서 메이저 언론사 사주와 격돌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인 98년 3월 초 당시 박지원 청와대 대변인은 <중앙일보> 가판을 보고 난 뒤 중앙일보사 사장실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홍석현 사장과 편집인 금창태 부사장, 한남규 편집국장 등이 모여 있었다.
박 대변인은 그들을 향해 “우리가 야당도 아닌 집권당인데 이렇게 섭섭하게 해도 되느냐”고 큰 소리를 쳤다. 97년 대선 당시 반 DJ성향을 보였던 <중앙일보>가 정권을 잡은 뒤에도 여전히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가만있지 않겠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박 대변인의 ‘협박성 발언’에 <중앙일보> 경영진도 고성을 질렀고 박 대변인은 책상 위의 크리스탈 물잔을 내동댕이쳐서 박살냈다는 후문이다.
<중앙일보>는 99년 10월 홍석현 사장이 보광그룹 계열사의 세금포탈 혐의로 전격 구속됐을 때 이 사건을 ‘여권 실세의 언론탄압 사례’로 보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박 전 실장은 “당시 기자들과 술을 마시다가 찾아가서 다소 취한 상태였다. 그러나 물잔을 던진 것이 아니라 저쪽과 실랑이를 하는 과정에서 탁자 위의 물잔이 밀려 떨어진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날 해프닝의 진위와는 무관하게 박 전 실장이 언론에 대해 ‘터놓고 지내는 방식’을 선호했던 것은 분명하다.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취기를 빌어 민감한 얘기를 서슴지 않고 쏟아내곤 했다. 예컨대 <조선> <동아> 등 DJ정권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메이저 언론들의 사주에 관한 비난도 직설법으로 털어놓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음담패설’도 즐겼다. “밤늦게까지 술 먹고 집에 들어가서 곤히 자는 집사람을 건드리지 말라. 밖에서 다 해결하고 들어가라”는 말은 박 전 실장이 술자리에서 즐겨 쓰던 농담이었다고 한다. 야당시절에 여자문제로 곤욕을 치렀던 박 전 실장이 이런 식으로 농담을 하는 게 다소 위험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솔직한 태도가 오히려 언론인들에게 먹혀들었다는 게 정치권 주변의 평판이다.
박 전 실장과 함께 DJ정권의 양대 실세라고 볼 수 있었던 권노갑씨는 언론과의 관계에서만큼은 대조적이었다. 권씨는 주로 과거의 민주화 동지 또는 당료 출신 인사들을 챙기는 데 주력했고 언론과는 소원한 편이었다. 일선 기자들 사이에서 인기도 없었다.
‘권씨는 사람을 만나 악수하고 나면 뒤돌아서서 손을 닦을 정도로 결벽증이 있다’는 평판이 권씨의 이미지를 지배했다. 기자들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도 받았다.
예컨대 정권 초반기에 권씨가 언론사 정당 출입기자들의 팀장인 국회반장들과의 골프 회동을 가진 적이 있다. 운동을 마친 뒤 권씨는 골프장 클럽 하우스가 아닌 시내 호텔의 중식부에서 식사를 하자고 제안을 했다. 이에 국회반장들은 호텔로 가서 기다렸으나 끝내 권씨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참석자들은 권씨 없이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으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당시 모임에 참석했던 한 기자는 “권씨가 아무리 DJ의 최측근이고 권력실세지만 무시당한 느낌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 심한 경우도 있었다. 민주당의 중견급 출입기자들과 저녁 약속을 해놓곤 아예 바람을 맞혔다. 10여 명의 중견 기자들은 한 시간 이상 기다렸으나 끝내 권씨는 오지 않았다. 대신 권씨의 측근인 M씨가 민주당의 부대변인 및 부위원장급 5∼6명과 함께 와서 저녁을 마쳤다. 물론 M씨가 좌장 노릇을 했다는 후문.
권씨가 집권 5년 동안 각종 비리 연루설에 시달리고 막판에도 구속되는 비운을 겪었던 게 이처럼 언론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던 점도 일부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상대적으로 박 전 실장은 간헐적으로 비리 연루설이 제기되곤 했으나 불씨가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언론의 해결사’ 역할을 자임해왔던 덕을 상당히 본 셈이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박지원은 기자 같은 사람이다. 새벽별 보고 나와서 밤늦게까지 술 먹고 집에 들어가는 생활스타일을 봐도 그렇다. 수첩을 보면 글씨도 큼직큼직하게 잘 쓰고 빨리도 받아 적는다. 무엇보다도 박 전 실장은 정치권과 언론이 과거 방식으로 공존해왔던 시대를 마지막으로 장식한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