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KBS 다큐 3일
길을 따라 걷는 것일까, 걸어서 길이 되는 걸까. 둘 다 맞는 말이다. 누군가는 길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 발자취를 따른다.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류가 필요하고 자신의 구역을 넘어 상대방에게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종단이 서로 다른 송광사와 선암사의 스님들이 왕래하다 자연스레 만들어진 길, 그 발자취를 따라 매년 약 50만 명의 탐방객이 찾는 순례길이 된 전남 순천의 ‘굴목재’는 그래서 더 특별하다.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폭포를 지닌 조계산은 양쪽으로 유명한 절을 두 개나 품고 있다. 동쪽으로는 ‘태고종’의 총본산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선암사가, 서쪽으로는 ‘조계종’ 승보 사찰이자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집필된 송광사가 있다.
이 두 절을 잇는 길이 바로 굴목재다. 굴목재는 총 길이 약 6.5km, 성인 평균의 보폭으로 걸을 때 만 걸음이다. 가파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걸으며 인생의 지혜를 찾고 참된 자유를 발견하는 사람들과 동행했다.
굴목재 초입에 있는 편백 숲에서 아름드리 나무를 껴안고 있다. 선암사에서 시작되는 굴목재의 초입 부분에는 아름드리 편백 숲이 있다.
곧고 힘차게 뻗은 편백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따사로운 햇살이 틈을 비집고 쏟아진다. 비 오는 날에는 운무가 껴서 몸을 에워싸는데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노년에 이르러 수술을 받은 환자도 아픈 부모님을 간호하는 중년의 자식도 모두 잠시나마 삶의 무게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다.
누군가에게는 홀로 내면을 정리하는 길이 되지만 여럿이 온 이들에게 길은 또 하나의 즐거운 놀이터가 된다. 어릴 적 한동네에서 자란 중학교 산악회는 계곡에 발만 담갔을 뿐인데 40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개울가에서 신나게 물장난을 치며 서로를 빠트리다가 돌탑을 향해 경건히 자식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모습에서 우리 주변의 평범한 ‘어른이’를 발견한다.
길도 그대로 우정도 그대로. 세월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자연과 사람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굴목재에서 혼자 걷는 탐방객을 꾸준히 만났다. 혼자 걷기 좋은 곳이다. 다른 사람보다 속도가 조금 느리면 느린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자기만의 속도로 걷는 탐방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병이 있음에도 중간에 간식으로 당을 충전하며 걷는 강민석 씨(71)는 이윽고 도착한 정상에서 밝은 표정으로 휴식을 만끽한다.
다른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젊은 소방관은 화재 현장에서의 상흔을 지우고 뜨거워진 땀을 바람에 식히며 몸과 마음을 다진다.
송광사 불일암에 머무르며 ‘무소유’를 집필했던 법정스님이 생전에 걸어온 길은 순례객들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곧게 뻗은 대나무가 빽빽하고 총총한 새소리로 가득해 길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잡생각이 비워진다.
‘무소유란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는 글귀를 포함한 법정스님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지금 불일암에 머무르고 있는 그의 제자, 덕조 스님.
출타를 마치고 돌아와 마지막 날에 만난 그가 무소유길과 굴목재에 담긴 숨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