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세훈, 박근혜 |
지난 3월 중순 어느 날 서울 시내에 위치한 한 특급호텔에 오세훈 시장이 측근 인사 한 명만을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5분 후 같은 장소에 박근혜 전 대표가 나타났다. 오 시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역시 친박 의원 한 명이 박 전 대표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당시 30여 분간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비공개였기 때문에 대화 내용은 물론 만남 자체가 정치권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친박계의 한 의원은 “오 시장이 먼저 요청했고 박 전 대표가 이에 응한 것으로 안다. 일 대 일로 만난 자리였기 때문에 최측근들조차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잘 모른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어 이 의원은 “다만 둘이 만난 시기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3월 중순은 소장파를 중심으로 서울시장 제3후보론이 제기되던 때다. 오 시장으로선 당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박 전 대표에게 지지를 호소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0여 일 뒤인 4월 초 오 시장과 박 전 대표는 서울 모처에서 또 다시 만났다. 이번 역시 오 시장이 먼저 제안한 만남이라고 한다. 앞서의 친박 의원은 “지난 3월 중순에 만나 대화할 때 오 시장이 조만간 또 찾아뵙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실제로 성사된 것이다. 3월 회동 때는 박 전 대표 스케줄 때문에 길게 대화를 못했는데 4월에는 한 시간 넘게 만났다. 지방선거는 물론 주요 정국 현안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오 시장의 서울시장 선거를 돕고 있는 한 인사 역시 “3월 회동 때는 시간이 촉박해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에 다시 만났을 때는 제법 속 깊은 대화들이 오갔다고 한다. ‘굉장히 화기애애했다’며 오 시장이 흡족해했다는 말이 선거 캠프까지 들렸다”고 말했다.
오 시장과 박 전 대표는 올해 1월 초에도 만난 적이 있다. 당시에도 오 시장이 먼저 박 전 대표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오 시장 선거캠프의 이종현 대변인은 “한나라당 주요 정치인들에 대한 신년 인사차였다. 박 전 대표뿐 아니라 강재섭 전 대표 등도 찾아갔다.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1월 회동을 남다른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동안 오 시장과 박 전 대표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는 않았기 때문. 특히 친박 내에선 오 시장에 대한 ‘배신감’이 컸다고 한다. 친박계의 한 보좌관은 “박 전 대표가 괴한에게 습격을 받으면서까지 서울시장 지원유세를 했는데, 결국 오 시장이 대통령 경선에서 누구 편을 들었느냐. MB(이명박 대통령)를 지지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친박 캠프 내에선 오 시장을 향한 비난이 컸었다”고 털어놨다. 따라서 1월 회동은 오 시장이 박 전 대표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첫 단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 시장은 올해 들어서만 세 번씩이나 왜 박 전 대표를 만난 것일까. 이에 대해 오 시장의 한 측근은 “결국은 지방선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연초 회동에서 지방선거 얘기를 꺼내긴 했지만 박 전 대표가 별다른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대책 회의를 하기도 했다”면서 “3월과 4월은 보다 더 절박한 심정으로 박 전 대표를 만났다. 1월만 하더라도 경선은 별 문제가 안 될 것으로 봤는데 당내 일각에서 대안론이 불거지는 등 위기 의식이 고조됐다. 또 한명숙 무죄 바람이 가시화될 경우 여론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선거의 여왕’인 박 전 대표 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선거캠프 내의 결론이었다. 오 시장이 박 전 대표를 만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오 시장이 지방선거 협조를 부탁했지만 박 전 대표가 웃기만 했던 것으로 안다. 2차 회동은 두 가지로 해석해야 한다. 우선 당내에서 오 시장 지지 세력이던 친이계 일부가 ‘제3후보론’ 등을 제기하자 박 전 대표에게 ‘SOS’를 보낸 것이 첫 번째고, 자신을 흔드는 친이계를 향해 ‘박 전 대표와 손잡을 수도 있다’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기 위한 것이 두 번째다. 3차 회동은 한명숙 전 총리 무죄 가능성이 점쳐지던 4월 초라는 점에서 ‘본선’을 생각하고 만났을 것으로 본다. 오 시장 지지율이 워낙 높긴 하지만 한명숙 무죄와 고 노무현 대통령 사망 1주년 추모 열기가 합쳐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냐.
지난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그렇듯이 박 전 대표가 힘을 보태주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에 오 시장이 박 전 대표를 만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오 시장과 박 전 대표의 만남을 ‘지방선거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는 견해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다. 특히 세 번째 회동에서 개헌에 대한 입장을 서로 나눈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오 시장과 박 전 대표가 ‘지방선거 이후’도 함께 논의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에선 이명박 정부 집권 후반기 최대 이슈는 개헌이 될 것이란 데에 별다른 이견이 없는 상태. 현재 박 전 대표는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긴 하지만 될 수 있으면 현행 헌법대로 대선을 치르기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친이계는 대통령 권력을 제한하는 이원집정부제 혹은 분권형 대통령제 등을 선호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 차기 유력 주자들인 박 전 대표와 오 시장이 개헌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은 것을 정가에서는 남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한 정치 컨설턴트는 “차기가 됐든, 차차기가 됐든 박 전 대표와 오 시장 모두 대통령 권력을 대폭 줄이는 개헌에는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개헌이 둘 사이의 공통분모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치가 인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표적인 ‘미래권력’으로 여겨지는 박 전 대표와 오 시장이 한 목소리를 낼 경우 친이계 역시 개헌을 밀어붙이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친이계에선 오 시장과 박 전 대표 회동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기류가 우세해 보인다. 지방선거에 나오는 후보자라면 누구나가 박 전 대표 지원을 원하고 있는데 굳이 오 시장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불거지고 있다. 한 수도권 친이 의원은 “친이계로 분류할 수 있는 ‘잠룡’들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오 시장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오 시장도 당내에서 지지해주는 계파가 필요하겠지만 우리 역시 오 시장과 같은 유력 후보를 잃어서는 안 된다. 정치권에서 사람 하나 키우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는 다들 잘 알 것 아니냐. 뭔가 오해가 있으면 이 기회에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오 시장 선거캠프 내부에선 이번 경선 과정에서 친이계가 보여준 행태를 놓고 섭섭해 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오 시장의 또 다른 측근은 “본선도 아닌 경선에서 수많은 마타도어들이 나왔고, ‘오세훈 흔들기’가 시도됐다. 아무리 오 시장이 일등을 달리고 있긴 하지만 TV 토론회에서도 나머지 세 후보가 모두 오 시장만을 공격했다. 여론조사에서 오 시장이 압도적으로 앞서지 않았다면 아마 친이계 공세가 더욱 심했을 것이다. 이렇게 상처를 내고도 본선에서 이기길 바라는 건 너무한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 역시 “경선을 거치는 동안 오 시장이 친이계를 향한 불만을 여러 차례 토로했다. 더 이상 친이계를 신뢰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면서 “이번에 당선되는 서울시장은 이명박 대통령보다는 차기 대통령과의 파트너십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 차차기를 위해서라도 차기 대통령과의 관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오 시장이 박 전 대표를 찾아간 것이 사실이라면 그 때문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