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여고를 졸업하고 MBC 10기 탤런트가 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 스무 살. 하지만 선 굵은 마스크는 당시 말랑말랑한 TV 드라마에서 적절한 캐릭터를 만나지 못했고 그녀는 미련 없이 충무로로 향한다. ‘방숙희’라는 이름을 나영희로 바꾸어준 사람은 데뷔작 <어둠의 자식들>(1981)의 이장호 감독이었다. 나운규 감독의 성에 ‘영화하는 여자’(映姬)라는 뜻의 ‘영희’를 붙인 이름이었다.
그녀의 시작이 <애마부인>(1982) 전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충무로의 모든 여배우들을 에로티시즘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빨아들였던 1980년대. 그 본격적 시작이 1982년의 <애마부인>이라면 나영희는 당시 사회파 감독이었던 이장호의 <어둠의 자식들>에서 출발한다. 항상 의도대로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어떤 ‘메시지’를 중시했다. 이후 그녀의 최고 흥행작이 되는 <매춘>(1988)도 마찬가지인데 이 영화는 에로티시즘 영화이면서 동시에 ‘매춘 공화국’인 한국 사회를 비판한다.
성공적인 데뷔작은 신인 배우에게 영광이자 굴레였다. 가수 지망생 ‘카수 영애’가 사창가 창녀로 전락하는 과정을 그린 <어둠의 자식들>을 통해 그녀의 호소력 있는 눈빛은 빛날 수 있었지만 그녀에게 충무로가 허락한 역할은 극도로 한정되기 시작한다. 이후 나영희가 보여준 필모그래피는 작은 투쟁이었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 82>(1982)처럼 강렬한 이미지도 있었지만, <밤의 천국>(1982)이나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1982)처럼 윤락녀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간 영화도 있었다. 칙칙한 구닥다리 멜로도 있었지만, <적도의 꽃>(1983) 같은 스릴러도 있었다. <이브의 건넌방>(1987)에선 형부를 유혹하는 처제였고, <야누스 불꽃 여자>(1987)에선 자신을 윤간한 남자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안겼다. 하지만 데뷔작만큼 임팩트 있는 영화를 만나진 못했고 이때 그를 찾아온 영화가 바로 <매춘>(1988)이었다.
88올림픽 동안 느슨해진 검열을 틈타 제작된 이 영화는 연극 상연 당시부터 화제였던 작품이었다. 이 영화에서 고급 콜걸로 등장해 “사는 놈이 있으니까 파는 년이 생기지!”라고 소리치는 그녀는 매춘녀라기보다는 여전사에 가깝다. 이 이미지는 그녀가 아무리 여성의 운명성을 강조하는 영화에 등장하더라도 결코 부서지지 않았던, 나영희라는 배우만이 지닌 ‘강단’이었다. 하지만 이후 나영희의 필모그래피는 현격히 줄어든다. 한때 1년에 대여섯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그녀는 <매춘 2>(1989)를 이후로 사실상 영화 활동을 접었고, 1991년 결혼과 함께 꽤 긴 휴식을 가진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저의 이미지가 처져 보이고 조금은 퇴폐적인 면도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니거든요. 어느 역이든 나름대로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도 변화를 나타낼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면에서 나영희는 불운한 배우였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시간이 갈수록 그 퀄리티가 떨어졌는데, 이것은 1980년대 한국영화와 궤적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어둠의 자식들>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화녀 1982>에서, 스무 살이 갓 넘은 여배우의 연기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힘 있고 깊은 느낌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나영희는 이후 시시한 역할들 속에서 고통 받았다. 고정되어 버린 이미지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를 만나지 못했다. <매춘> 이후 그녀가 영화계를 떠난 건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더 이상 매춘녀나 에로틱한 이미지로 낙인찍히는 것을 거부했다.
배우로서 30대를 휴식 속에서 지낸 나영희는 불혹의 나이를 넘겨 브라운관으로 돌아왔다. 놀라운 자기 관리를 통해 20대 시절의 느낌을 고스란히 지닌 그녀는 부드럽고 후덕한 느낌이 아닌 파워풀하고 까칠하며 개성 넘치는 이미지로 돌아왔다. 드라마 <스타일>의 손병희는 그녀의 카리스마가 여전함을 보여준 캐릭터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