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일(한국시간) 열린 한국-그리스 경기에서 박지성이 첫 골을 넣고 있다. |
“이번 월드컵대표팀 선수들은 한마디로 ‘투혼’의 팀입니다. 그 투혼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고 있어요. 한ㆍ일전부터 오스트리아 전지훈련지에서 치른 벨라루스, 스페인전까지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걸 극복해 나가는 부분들이 이번 대표팀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리스전이 끝난 후 믹스트존에서 만난 대표팀 주치의 송준섭 박사는 한국대표팀의 투혼에 감동했다는 얘기를 꺼냈다. 이제 겨우 월드컵 첫 경기를 치른 만큼 그동안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대표팀 내에서 있었던 사연을 모두 꺼내 놓을 수는 없지만, 월드컵 직전에 주전 선수들이 이런 저런 부상으로 훈련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속출하자 주치의로서 애간장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박주영 선수의 왼쪽 팔이 빠지는 부상도 부상이지만 가장 잊지 못할 선수는 대상포진 확정 판정을 받은 조용형 선수였어요. 가슴에 통증을 느낀다며 치료실 문을 두드렸는데 그동안 임상 경험상 아무래도 대상포진인 것 같아 한국의 관련 전문의에게 문의를 했더니 대상포진이 맞는 것 같다고 얘길 하더라고요.
40세 이하의 젊은 사람은 설사 대상포진이라고 해도 훈련하는 데 지장이 없다고 했지만 허정무 감독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훈련을 하지 말고 무조건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하셨어요. 그런 선수가 오늘 그리스전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펼쳐보였잖아요. 정말 너무나 고맙고 감동스러웠습니다.”
2010월드컵대표팀에는 최고참 이운재부터 김남일 안정환 이동국 등 주전으로 뛰지 못하는 고참들이 눈에 띈다. 이동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2002, 2006월드컵에서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로 주목받았던 ‘빅3’. 그런 선수들이 남아공월드컵에서는 후배들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고 벤치 멤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후보들을 위해 ‘아낌없이 주련다’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대표팀 언론담당관인 이원재 부장은 고참 3인방에 대해 이런 설명을 곁들였다.
▲ 승리한 한국 대표팀이 부둥켜 안고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
그리스전이 열리는 날 아침, 이운재는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김현태 골키퍼 코치를 맞이했다. 김 코치는 어렵게 이운재에게 정성룡이 그리스전에 뛰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그때 이운재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김 코치님, 성룡이 그동안 준비 잘해왔어요. 충분이 이번 경기에 뛸 자격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축구협회 이원재 부장은 4년 전 대표팀과 이번 대표팀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자유’를 꼽았다. 허정무 감독이 선수들의 생활에 대해 일체 간섭하지 않고 모든 건 주장 박지성과의 대화를 통해 결정한다는 것. 일례로 히딩크 감독 때부터 줄곧 있어왔던 월드컵 직전, 선수들의 단체 인터뷰가 이번 월드컵에선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허 감독도 남아공 입성 후 기자들의 요청을 받고 주장에게 의향을 물었지만 박지성이 선수들이 당분간은 단체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다고 전달했고, 허 감독은 선수들의 의견을 그대로 반영해 단체 인터뷰를 그리스전 이후로 미뤄놨다.
그리스와의 경기가 끝난 뒤 숙소로 돌아온 허정무 감독은 선수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얘길 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전만큼은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후회 없는, 미련 없는 경기가 될 수 있도록 너희들이 갖고 있는 실력의 120%를 발휘하길 바란다.”
그리스전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허정무 감독과 23명의 태극전사들은 그들 앞에 주어진 사진 한 장에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그 사진에는 시청 앞 광장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목 놓아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옷을 입은 국민들의 응원 장면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때 ‘캡틴’ 박지성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2002년의 열기가 다시 느껴졌다. 서울시청 앞에 모인 사람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한편 이번 그리스전 승리에 대해선 여러 가지 재미있는 분석이 나왔다. 현지에서 대표팀을 지켜본 축구인들은 가장 먼저 대표팀 신세대 선수들의 강심장을 승리의 동인으로 꼽았다. 예전 우리 선수들은 강팀을 만나면 지나치게 긴장해 경기장에서 표정이 굳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 대표팀에선 그런 부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부 선수들은 평가전을 하듯 경기를 즐겼다고 털어놓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다음으로 박지성의 리더십이다. 박지성은 이날 무려 9번이나 넘어졌는데 그중 8번은 상대 수비수의 파울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지성은 매번 훌훌 털고 일어났으며 미소까지 보였다. 상대의 심리전에 말리지 않고 차분하게 팀을 이끈 박지성의 이런 의연한 플레이에 일부 네티즌들은 ‘대인배 플레이’라고 칭송했다.
그리스전은 모든 선수들이 잘했지만 특히 이정수, 차두리, 박주영의 업그레이드된 플레이가 돋보였다. 이정수는 수비수였지만 공격수 출신답게 전반 7분께 절묘한 위치선정으로 첫골을 기록했고, 차두리는 그리스의 주공격수들을 파워와 스피드로 무력화시켰다.
박주영 또한 신체적으로 월등한 그리스 수비수들 사이에서 원톱으로 외롭게 맞섰지만 밀리지 않고 제공권을 장악, 번번이 공중볼을 따내는 등 맹활약했다. 현지 기자들은 아이폰 4G 등장에 빗대 이들을 ‘한국축구의 4G’라는 이색 평가를 하기도 했다.
포트엘리자베스=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