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엔 에로 시리즈를 대표하는 스타들이 있었다. <빨간 앵두> 시리즈의 이수진, <변강쇠> 시리즈의 원미경, <매춘> 시리즈의 나영희, <애마부인> 시리즈의 안소영-오수비-김부선 등이 바로 그들. 1990년대가 되면 <변금련> 시리즈의 강리나가 추가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산딸기> 시리즈다. 1982년에 첫 편이 나왔을 때 그 주인공은 안소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산딸기> 시리즈를, 그 시작이었던 안소영이 아니라 속편에 출연했던 선우일란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선우일란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던 시기는 1980년대 초였다. 당시 스타들의 등용문이었던 학생 잡지 표지 모델이 된 그는 1982년부터 광고 모델로 활동했고 이후 40~50편의 CF에 출연하며 경력을 쌓았다. 이 시기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은 바로 <산딸기>(1982)의 김수형 감독. 안소영이 떠난 자리를 채울 신인을 찾던 그는 선우일란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선우일란은 <산딸기 2>(1984)로 데뷔하며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다.
첫 영화 개봉 당시 19세였던 선우일란은 안소영, 오수비, 원미경 등의 선배 여배우들과는 확실한 변별력을 지녔다. 이른바 ‘청순 글래머’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사실 글래머라기보다는 ‘균형 잡힌 글래머’에 가까웠다. 그러면서 ‘품에 쏙 들어가는 여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산딸기 2>에서 마흥식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모습은 강렬한 보호 본능을 일으켰는데 그러면서도 베드 신의 리얼함은 대단했다.
단숨에 스타덤에 오르긴 했지만 선우일란이 출연할 수 있는 장르는 에로티시즘 멜로드라마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1980년대에 데뷔한 여배우들에겐 공통된 숙명과도 같은 것. 그는 데뷔 다음 해인 1985년에 세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고 1986년엔 무려 8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최다 편수 기록을 세웠다. 스무 살 전후의 여배우는 주로 나이 든 남성들 사이에서 정신적으로 갈등하고 성적으로 고민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가 천편일률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올라타기>(1986) 같은 영화는 다소 진부한 감은 있지만 신분상승을 위한 육체와 그 비극적 결말을 담아낸, 당시로서는 나름 주제 의식을 담은 영화였다. <설마가 사람 잡네>(1985) 같은 영화에선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여배우에게서 삶의 신산을 담은 표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곰삭은 감정과 한을 지닌 마스크의 소유자였다. 최재성이나 전영록 등 당대의 청춘스타들과 함께한 <작은 고추>(1986) <돌아이 3>(1987) 같은 영화들보다, <물레방아>(1986)나 <떡>(1988) 같은 이른바 ‘토속물’에서의 그녀가 더욱 기억에 남는 건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데뷔 당시 “도금봉, 김혜정, 안소영을 잇는 육감적인 배우가 되겠다”던 선우일란은 5년 동안 18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타올랐으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에로 영화의 퇴조와 함께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었다. 20대 중반의 여배우에겐 꽤나 잔인한 상황인 셈. 이후 1991년까지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그는 1993년에 TV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를 마지막으로 출연한 뒤 미국으로 떠났다. 20대 후반의 은퇴인 셈이었다.
배우 활동을 접은 후 선우일란의 인생은 그다지 평탄하진 않았다. 어느 사업가와 만나 임신 5개월의 상태에서 결혼식까지 올렸지만 남편의 전처가 낳은 딸과 트러블이 생기면서 신혼 생활은 쉽지 않았고 결국은 결혼한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이혼했다. 현재는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사는 싱글맘. 2006년에 단편영화에 잠깐 출연했는데 본격적인 컴백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이보희, 이혜숙, 금보라, 나영희 등 1980년대 충무로를 누볐던 여배우들이 아직도 건재한 지금, 40대 중반(1966년생)으로 막내 격인 선우일란의 귀환을 기다려 본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