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세상을 떠난 파라 포셋을 비롯해 강한 인상의 페이 더너웨이, 지적인 섹시함의 재클린 스미스 등 1970년대 할리우드의 ‘바디 라인업’은 대단했다. 여기에 과격한 각선미의 라켈 웰치나 섹스와 정치학이 결합한 원자폭탄 같은 배우 제인 폰다 등 1960년대 출신 배우들도 건재했고 브리지트 바르도나 소피아 로렌 등의 유럽 출신 글래머들도 대서양을 건너왔다. 이 ‘놀라운 70년대’의 끝자락에 등장한 한 명의 여배우가 있었으니 바로 보 데릭이다. 386 세대들이라면 후줄근한 동시 상영관이나 만화 가게에서 틀어주는 불법 비디오를 통해 통과의례처럼 접했을 영화 <볼레로>(1984). 그녀의 원숙미가 극에 달한 20대 후반 시절에 찍은 에로 영화계의 전설적 작품으로, ‘38-22-36’이라는 신이 내린 사이즈의 보 데릭은 가히 경배의 대상이었다.
데뷔와 함께 에로티시즘 배우의 전설로 등극했지만 어린 시절 그녀는 영화에 전혀 관심 없었다. 캘리포니아의 롱비치 출신답게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서핑과 승마. 어른이 되면 해변에서 서핑 숍을 하고 있을 거라고, 마치 운명처럼 믿고 있었다. 하지만 타고난 미모는 감출 수 없었고, 제품 홍보 전문가였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15세에 모델이 된다. 아버지가 홍보하던 모든 상품의 모델로 일하던 그녀는 그렇게 번 돈으로 새 서핑 보드를 살 수 있다는 기쁨으로 열심히 카메라 앞에 섰고 나중엔 TV 모델로 발탁되었다.
할리우드에서 헤어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활동하던 어머니도 보 데릭의 연예계 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그녀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를 만나러 갔던 보 데릭은 에이전트의 눈에 포착되었고, 곧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시절, 그녀를 발견한 사람은 존 데릭 감독이었다. 16세 소녀였던 보 데릭에게 빠진 아버지뻘인 46세의 중년 감독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잊고 그녀와 ‘애정의 도피 행각’을 펼친다. 미성년자 보호법을 피해 유럽으로 도망한 그들은 보 데릭의 18세 생일에 미국으로 돌아왔고 결혼식을 올린다(그들은 존 데릭이 세상을 떠난 1998년까지, 22년 동안 함께했다).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는 <텐>(1979)이었다. 어느 부부가 갈라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매력녀’ 역을 맡은 보 데릭은 레게 머리를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에 깊게 파인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해변을 달리는 장면 하나로 수많은 남성 관객을 녹였다. 남편 존 데릭이 연출한 <타잔>(1981)은 제인의 입장에서 재구성한 타잔 이야기. 그리고 역시 존 데릭이 연출한 <볼레로>는 보 데릭이 선사하는 천상의 판타지다. 특히 나체로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은 한국영화 <애마부인>을 연상시키지만 그 노출과 스케일에선 한참 우위에 있는 에로틱 이미지였다.
이후 <귀신은 사랑 못해>(1989) <핫 초콜릿>(1990) <욕망의 볼레로>(1993) 같은 영화가 이어졌으나 보 데릭은 급격한 하강세를 겪는다. 가끔씩 최악의 영화를 뽑는 골든 래즈베리 시상식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을 뿐. 그럼에도 보 데릭의 전설은 끊이지 않았는데, 대중연예지 <피플>은 1999년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43세의 보 데릭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보 데릭 스스로가 대중과 멀어진 면이 더 강했다. 그녀는 30대에 접어들면서 연기 활동을 줄이고 동물 보호 운동에 전념했고, 승마 마니아로서 6마리의 말을 키우며 2000년엔 <승마의 교훈 Riding Lessons>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으며 대표적인 공화당 지지자로 한때 부시와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는 전선에 나서기도 했다.
최근엔 다시 연기로 복귀하는 분위기. 게다가 5세 연하의 배우 존 코벳과 조만간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한때 <플레이보이> 표지 단골 모델이었고 ‘해변의 아이콘’이었던 보 데릭. 야성 그대로를 간직한 모습은 모방할 순 있어도 복제할 순 없는 독보적인 이미지였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