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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에로비디오의 역사는 1990년대 중반까지 급격한 양적 팽창을 겪지만 돌파구를 찾진 못하고 있었다. 산업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스타가 필요했지만 ‘유호프로덕션’이나 ‘한시네마타운’ 같은 브랜드는 있어도 이렇다 할 배우는 없었다. 이때 진도희가 등장했다.
<젖소 부인 바람났네>(1995)라는 파격적인 제목의 영화는 1편과 2편이 연달아 비디오 대여점을 강타했다. 충무로에서 잔뼈 굵은 B급 장르영화의 달인이며 <원한의 공동묘지>(1983)로 유명한 김인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에로와 스릴러가 결합된 작품. 1편이 성불능 상태의 남편과 젊은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며 마스터베이션으로 밤을 지새우는 유부녀의 이야기라면, 2편에선 갑자기 스릴러로 돌변해 처절한 유혈극으로 마무리된다.
에로비디오의 여배우 입문기가 대부분 ‘갑자기’ 이뤄지는 데 비해 진도희에겐 워밍업의 시기가 있었다. 1971년생(본명 김은경)으로 여고를 졸업한 후 그녀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섰던 건 1991년이었다. 친구 따라 모델 활동을 하게 된 그녀는 이후 대전엑스포 미인대회에서 선으로 입상했고 비디오영화인 <키스 키스>(1993)로 데뷔한다. <그 여자의 숨소리>(1994)는 그녀의 첫 극장용 장편영화. 타고난 성욕을 숨길 수 없어 괴로워하는 여자 역을 맡았다.
<키스 키스> 때 알게 된 한지일은 그녀를 스타로 만든다. <젖소 부인 바람났네>는 그녀를 ‘장안의 글래머’로 만들었고 25세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원숙한 느낌을 풍기는 ‘젖소 부인’은 ‘한국의 가슴’으로 떠올랐다. <애마부인>(1982)의 안소영 이후 1980년대를 뒤흔들었던 글래머의 계보는 한동안 시들했다가 진도희를 통해 부활했고 사람들은 단지 ‘진도희’라는 이름만 보고 비디오를 빌려갔다. 당시 대여점 시장에서 이런 파워는 할리우드 A급 스타들에게 가능한 영예였다.
여기서 진도희가 놀라운 건 주류와 비주류를 넘나드는 능력이었다.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문화였던 에로비디오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진도희는, 1~2년 만에 메인 스트림에 합류했다. 1997년 연극 <욕망의 섬> 무대에 선 그녀는 1998년엔 TV 드라마 <단단한 놈>에서 코믹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예능 프로그램에도 종종 선을 보였고 <우정의 무대>에 등장해 장병들의 가슴에 울렁증을 선사하기도 했다. 비록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그녀가 거둔 성과는 그 유례가 없는 것이었으며 이후 하소연(현재 ‘하유선’으로 가수 활동)이나 유리(현재 ‘성은’으로 가수 활동) 정도가 그 계보를 잇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주류에 안착하지 못한다. <젖소 부인 바람났네>를 극장용 장편영화로 찍으려 했던 꿈도 이뤄지지 못했고, 한지일과 함께 찍으려던 누드집 계획도 단지 계획에 머물러야 했다. 트렌드가 바뀌면서 미소녀 콘셉트의 에로배우들이 속속 등장했고, 에로비디오 산업 자체가 하향세에 접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 자신도 흔들렸다. 2000년엔 자신의 유흥업소에 미성년자를 고용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2003년엔 한지일과 법정 싸움을 벌였다. 자신이 과거에 찍은 영상을 한지일이 짜깁기해 출시했으며 포르노 사이트에도 올라 성적 수치심을 자극했다는 것. 이후 한지일은 진도희와 결별하고 진도희를 능가하는 왕가슴의 소유자 이진희를 발굴해 <젖소 부인 바람났네>의 12탄을 내놓기도 했다. 이후 결혼과 함께 사라진 그녀가 대중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가슴용 마사지 크림 광고였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굳이 앞에 ‘에로’를 붙이지 않아도 ‘배우’로 활동할 수 있었다. 어쩌면 좀 더 탄탄한 연기 수업을 받았을지도 모르며 좀 더 장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로의 성에 갇힌 후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스타덤에 올랐고, 그만큼 빨리 사라졌다. ‘1990년대의 가장 뜨거웠던 이름’이었던 진도희. 올해로 마흔 살이 된 그녀는 이제 추억 속의 이름이 되었고, 그녀의 컴백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