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13일 오후 서울대병원에서 전날 타계한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 빈소를 찾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고 앙드레 김이 남긴 유산은 어느 정도일까.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긴 힘들지만 대략적으로 고인의 유산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고인이 대표이사로 재직하며 사업을 진두지휘한 ‘앙드레김디자인아뜨리에 주식회사’, 그리고 고인의 집과 회사 건물 등의 부동산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앙드레 김’이라는 브랜드의 상표권이다. 어마어마한 부동산과 현금 등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리라 여기는 이들도 많지만 고인의 지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한 벌에 500만~1000만 원가량의 고가의 의상을 제작 판매했는데 맞춤복이라 수량이 많지 않았고 판매 의상보다는 패션쇼 등을 위한 작품 의상 제작에 더 심혈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에도 앞장서 왔다. 그나마 99년 옷로비 청문회 이후 대중의 호감도가 높아지면서 사업이 번창해 2001년 신사동 아뜨리에 건물을 구입하고 지난해엔 용인시 기흥에도 아뜨리에를 지을 수 있었다.
고인의 유서가 공개되진 않았지만 유산은 대부분 양아들인 김중도 씨에게 상속될 전망이다. 2남 3녀 가운데 넷째였던 고인은 이미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가족은 양아들 김 씨 뿐이다. 지난 82년 먼 친척으로부터 생후 1년 6개월의 김 씨를 입양한 고인은 극성 학부모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정성껏 키웠다. 지난 2004년 결혼한 김 씨는 쌍둥이 딸과 아들을 낳아 고인에게 큰 기쁨을 안겼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불어를 전공한 뒤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아들 김중도 씨는 현재 앙드레김디자인아뜨리에 주식회사 감사로 등재돼 있다. 김 씨의 네 살 연상 부인 유은숙 씨는 본래 고인 밑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었다. 따라서 이들 부부가 고인의 회사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고인과 김 씨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임원으로 등재된 임세우 실장이 워낙 고인의 최측근이었던 만큼 그가 회사 운영을 맡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창작 생활에 몰두하며 살아온 세계적인 예술인인 탓인지 생전 고인의 모습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모습들이 많았다. 유난히 흰색을 좋아해 흰색 의상만 즐겨 입은 것부터 독특한 그의 영어발음 등등. 그런데 가장 특이한 부분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인의 자서전 <My Fantasy>를 보면 그의 사랑과 가정에 대한 개념이 상당히 보수적임을 알 수 있다. 지인들은 고인이 불륜 등이 주된 소재인 막장 드라마를 굉장히 싫어했을 정도라고 한다. 결혼에 대한 생각도 상당히 긍정적이다. 그의 패션쇼 피날레가 늘 결혼식 장면일 정도다. 독신주의자로 보이지만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선 “독신주의에 절대 반대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고인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를 ‘일에 몰두하다 보니 결혼을 생각할 수 없었다’라고 밝히곤 했다. 또한 양아들을 입양해 가정을 꾸려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지만 고독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얘기도 자주 했다. 술 담배 도박 등을 전혀 못하는 데다 노래방 등 유흥에도 관심이 없어 ‘일 외에는 낙이 없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늘 그의 결론은 ‘독창적인 세계를 지켜가기 위해선 고독을 이겨내야 한다’로 마무리됐다.
고인의 패션쇼에는 전문 패션모델들도 무대에 오르지만 메인 무대는 늘 연예인의 몫이다. 그가 유명세를 처음 얻은 것 역시 1964년 신성일과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엄앵란이 그의 웨딩드레스를 입으면서부터다. 이후 여러 여성 톱스타의 웨딩드레스를 손수 만들었고 톱스타가 되려면 고인의 패션쇼 메인 무대를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또한 각국의 주한 대사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항간에선 고인이 마케팅을 위해 의도적으로 연예인과 주한 대사들과의 친분을 중시해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생전에 고인은 인터뷰를 통해 “전문 모델은 세련된 반면 감성적인 면이 부족한데 연예인은 풍부한 감성과 표정으로 감동적인 무대를 만들어 준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또 주한대사들과의 친분에 대해선 “각국의 독특한 문화와 국제 사회 예절을 접할 수 있으며 수준 높은 지적 대화로 사고의 폭도 넓힐 수 있다”고 말했다.
연예인들은 고인의 인간미에 끌려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답한다. 기자 역시 고인의 그런 면모를 목격한 기억이 있다. 지난 2000년 김희선이 ‘누드 화보집’ 관련 기자회견을 열었을 당시의 일이다. 취재진보다 먼저 기자회견장에 도착한 고인은 예정보다 한 시간 이상 기자회견이 늦어졌지만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기자회견이 모두 끝나자 힘겨워하는 김희선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힘내라는 격려의 말을 건넸다. 이를 위해 서너 시간을 서서 기다린 것. 이런 진심어린 격려와 배려에 연예인들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었다.
한편 고인과 유가족들이 고인의 투병 사실을 최대한 감추려 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집중되고 있다. 지인들은 그 까닭은 고인이 원치 않았던 데다 그만큼 다시 일어설 의지가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대학병원 관계자 역시 “며칠 전까지 산소 호흡기를 떼고 미음을 드시는 등 회복하려는 의지가 대단했다”고 전한다. 이런 탓에 김희선 등 지인들의 병문안도 모두 고사해 아들 김 씨와 아뜨리에 직원 두 명이 병상을 지켰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