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사카이 히데유키(오른쪽) 7단이 장쉬 9단을 꺾고 기성전 타이틀을 쟁취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
8월 27일 도쿄 일본기원에서 벌어진 제35기 기성전 도전5번기 제5국에서 일본 프로바둑 4관왕, 대만 출신의 장쉬 9단(30)에게 백을 들고 불계승, 종합 전적 3승2패로 타이틀을 쟁취한 것.
기성전은 일본 바둑계 서열 7위의 타이틀. 12개 지방신문이 공동주최하는 기전으로 우승 상금은 777만 엔. 서열 1위의 기성전과 우리말로는 같은 ‘기성’이나 일본식으로는 서열 1위의 기성(棋聖)은 ‘기세이’고 7위는 기성(碁聖)은 ‘고세이’다.
고세이 도전기 시점에서 장쉬 9단은 서열 1위의 기세이를 비롯해 서열 4위 ‘십단’과 6위의 ‘왕좌’를 보유하고 있었다. 고세이를 잃어 4관왕에서 3관왕으로 조금 내려왔지만 서열 1위는 부동이었기 때문에 일본 바둑계뿐 아니라 세계 바둑계가 지금 사카이 7단의 타이틀 쟁취에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카이 7단은 1973년생, 2001년 입단. 스물여덟에 프로가 된 것이니 애초에 대성은 무망한 것이었고, 나이 서른일곱은 요즘 세태에서는 타이틀은커녕 승부의 일선에서도 진즉에 밀려난 것으로 여겨지는 판인데, 사카이 7단이 분연히 중년의 반란, 중년 만세를 외친 것. 게다가 그는 명문 교토의대를 나온 의사였다.
바둑은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아버지가 의사였다. 관서기원의 원로 사토 수나오 9단의 도장에서 신동 소리를 들었고, 이후 한국 바둑과 조훈현 9단을 사랑했던 후지사와 슈코 9단에게 사사했다. 후지사와 슈코의 원래 이름은 후지사와 히데유키(藤澤秀行). ‘秀行’을 히데유키라고도 읽고 슈코라고도 읽는데, 사카이 7단의 이름도 한자는 다르지만, 히데유키(秀至)다. 의대 재학 시절에는 세계아마대회(1999, 2000년)에서 준우승, 우승을 차지했고, 아마최강전을 6연패했다.
아마 강자로 날렸지만 프로기사가 된다는 생각은 없었다. 졸업하고 교토대 부속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예정 코스는 의사였지만 ‘나의 길’은 의사가 아닌 것 같았다. ‘나의 길’은 바둑인 것 같았다. 의사를 접고 관서기원의 문을 두드렸다. 프로가 되는 길은 두 가지였다. 입단대회를 통과하는 것과 시험기를 치르는 것. 그는 시험기에서 4전 전승으로 일약 5단을 인정받으면서 프로가 되었다.
프로 입문은 늦어도 많이 늦었지만, 입단하자마자 내달렸다. 2003년 관서기원 제1위 결정전에서 우승하고 2004년 신인왕을 차지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2005에는 ‘꿈의 본선’이라는 서열 2위, 명인전 리그에 진출했다. 명인전 본선리그에는 올해까지 6년 연속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강자의 반열에 들어선 것.
승부와 학업은 병행할 수 있는 것일까. 없다. 그게 정설이다. 대학을 나온 프로기사는 타이틀 홀더가 될 수 없고, 정상은 더구나 언감생심이라는 것, 그것도 정설이다. 대학 나온 프로기사 자체가 별로 없다. 이번 타이틀 획득으로 8단에 승단한 사카이 말고 대학 나온 프로기사로 일본기원 소속인 이시쿠라 노보루(石倉 昇) 9단이 있다. 1954년생, 1980년 입단. 일본 제일의 명문 도쿄대를 졸업했다. 입단은 역시 늦었지만 학창 시절 사카이만큼이나 이름을 날렸던 인물. 바둑계는 학교 공부에서 수재였던 이시쿠라가 바둑에서도 과연 수재의 면모를 보여줄지, 비상한 관심으로 주목했는데, 이시쿠라의 성적은 평범에 그쳤다. 학점으로 말하자면 B-, C+ 정도라고나 할까
우리 경우도 비슷하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했거나 적을 두고 있거나 진학을 희망하는 젊은 기사가 상당수 되지만, 예전에는 손꼽을 정도도 아니었다. 그중에서 승부와 학업의 병행가능성을 시도했던 기사로 홍종현 9단(64)과 문용직 5단(52)이 있다. 홍 9단은 경기고 서울법대의 이른바 KS. 고교 때 아마 정상급 실력이었고 1964년에 입단했으나 ‘고시’ 때문에 아마로 전향했다가, 사카이처럼 ‘나의 길’은 판검사나 변호사가 아니라 바둑인 것 같아 1969년에 다시 입단대회를 통과했다. 입단대회를 두 번 통과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지금은 일단 프로가 아마로 전향하면 다시 프로가 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지만 당시는 그런 것도 가능했던 것. 홍 9단의 프로 성적은 이시쿠라와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정도다.
문 5단은 서강대 영문과를 나온 후 서울대 대학원에서 정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 최초이자 지금까지 유일무이한 박사 프로기사다. 1983년 역시 스물셋 늦은 나이에 입단했는데, 입단 직후에는 누구나 반짝하는 ‘입단 끗발’을 보이지는 못했다. 프로 초년 시절에는 학업을 병행하느라 성적도 별로였던 것. 그러나 학위 취득 후 안정을 찾자 1987~88년 시즌 신인왕에 올랐고 박카스배에서 조훈현 9단과 타이틀 매치를 벌여 준우승을 차지했다.
1990년 중반 이후 바둑과 학문의 접목, 바둑의 학문화, 바둑의 인문학적 접근 등을 시도하면서 깊이 있고 격조 높은 바둑 글쓰기에 전념했다. 각종 매체에 칼럼을 기고했고 책도 여러 권을 냈다. 주역에 빠져들더니 ‘주역의 발견’이라는 책도 써냈다. 그리고 재작년에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는 어디론가, 정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직 행방이 묘연하다. 연락을 주고받는 상대가 없다. 지리산 어딘가에 혹은 괴산 쪽 어디에서 은둔하고 있을 거라는 얘기만 들린다.
명문대 출신으로는 홍 9단, 문 5단 전에, 홍 9단보다 선배인 기사 중에 서울상대를 다녔던 강철민 8단이 있다. 1970년대 초반 당시의 패자였던 김인 9단과 최고위전 등에서 타이틀을 주고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몇 년 전에 작고했다.
여성 기사로는 서울대 영문학과를 나온 남치형 초단(35)이 있다. 이창호 9단과 동갑이다. 현재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1990년 열다섯 살 때 입단했으니 프로 입문은 빠른 편이었는데, 20년 초단, 최장수 초단에 머물러 있다. 승부와 학업의 병행 성공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조혜연 8단에게 관심이 쏠린다. 1985년생으로 1997년에 입단. 이창호 9단의 11세 입단 다음 기록인 12세 입단 기록이다. 고대 영문과 재학생인데, 특기생이 아니라 정식 수능으로 입학한 실력. 바둑 성적도 여성 쪽에서는 정상급이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