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소녀시대가 도쿄 아리아케 콜로세움에서 일본 데뷔 공연을 가졌다. 공연장을 찾은 일본 팬들은 소녀시대의 의상과 헤어를 흉내내며 멋진 포즈로 응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일본 현지 분위기는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뜨거웠다. 걸 그룹 열풍으로 인해 한류팬층은 이젠 일본 10대에게까지 확대됐다. 단순히 일부 한류 마니아가 아닌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 자체에 변화가 생길 정도다. 일본 매스컴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인 칸노 토모코 씨와의 공동 취재로 일본 현지 걸 그룹 열풍을 들여다봤다.
본격적인 일본 진출을 시작한 소녀시대가 일본 데뷔 싱글 ‘GENIE’를 오리콘 싱글 주간차트 4위에 올리며 일본 진출한 외국 여자가수 가운데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카라가 데뷔 싱글 ‘미스터’로 5위(첫 주 판매량 2만 9238장)에 올랐던 기록을 소녀시대가 넘어섰다.
그러나 일본 음반 관계자와 취재진들은 오리콘 차트 4위가 갖는 의미를 과장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선 소녀시대의 음반 판매량은 4만 5000여 장으로 1위를 기록한 아라시의 53만여 장과는 차이가 너무 크다. 또한 일본 음반계와 매스컴은 조작 가능성이 있는 오리콘 차트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고. 다만 데뷔와 동시에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 일본을 대표하는 걸 그룹 AKB48과 나란히 3, 4위를 기록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는 반응이다.
일본 여성지 관계자는 현지 인기를 확인하기 위해선 오리콘 차트보다 아마존 사이트의 반응이 더 정확하다고 말한다. 확인 결과 일본 아마존 사이트에는 일본 팬들의 소녀시대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특히 ‘멋있다’ ‘귀엽다’ ‘스타일이 돋보인다’ ‘언니들처럼 되고 싶다’는 등의 반응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일본에서 카라의 별명은 ‘오시리(おしり·엉덩이) 댄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엉덩이춤’이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이런 별명이 생긴 것이다. 소녀시대는 각선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미각(美脚·아름다운 다리) 그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둘 다 섹시함이 강조된 별명인데 일본에선 두 그룹이 ‘상쾌하면서도 섹시한 걸 그룹’으로 평가받고 있는 셈이다.
▲ 카라가 지난 5월 일본 데뷔 관련 합동기자회견 및 공연을 마친 뒤 악수회를 가졌다. 연합뉴스 |
일본 매스컴이 요즘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소위 ‘소녀시대 현상’이다. 이는 일본 10대 여성 팬들이 소녀시대를 동경해 그들과 똑같은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헤어스타일과 머리색까지 따라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실제 도쿄 도심에선 소녀시대의 각 멤버들과 똑같은 의상과 헤어스타일을 한 여성이 서너 명씩 몰려다니는 모습을 손쉽게 볼 수 있다. 일본에서 비슷한 현상이 사회적 이슈가 됐던 경우는 일본을 대표하는 인기 여가수 아무로 나미에를 따라하는 10대 여성들로 인해 생겨난 ‘아무라 현상’이 유일하다. 소녀시대가 아무로 나미에 이후 처음으로 일본 10대 팬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된 여성 가수라는 해석도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이런 까닭을 일본 음반계에선 일본 걸 그룹이 갖는 태생적 한계에서 찾는다. 일본의 한 정통한 음반 관계자는 “현재 일본에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AKB48을 비롯한 걸 그룹들은 ‘아끼고 싶고 지켜주고 싶은 그룹’의 콘셉트로 남성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으며 오타쿠 문화로 변질됐다는 평도 듣곤 한다”면서 “이런 걸 그룹의 경우 여성들에겐 질투심을 유발시킬 뿐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공백을 카라와 소녀시대 같은 한국 걸 그룹이 채우기 시작한 것. 그러다 보니 한국 걸 그룹의 팬 층은 ‘소녀시대 현상’까지 만들어낸 10대 여성을 중심으로 30~40대 남성으로 확산되고 있다.
반면 20대와 30대 초반 남성들에겐 인기가 적은 편인데 이는 일본 사회 분위기와 맞물린다. 요즘 일본 젊은 남성들은 소위 ‘초식남’이라 불리는데 이들 세대는 적극적이고 강한 여성, 너무 완벽해 보이는 여성을 싫어하는 편이다. 그들에겐 소녀시대와 카라 같은 한국 걸 그룹 멤버들이 너무 강하고 완벽해 보이는 것.
이렇게 한국 걸 그룹이 높은 인기를 얻으면서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배용준을 필두로 한 한류 열풍이 한일 문화 교류를 촉진하고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생각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이는 중장년층 여성에 한정된 얘기였다. 이로 인해 10대 20대 딸들이 한류에 열광하는 어머니 세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소녀시대와 카라는 이제 일본 10대 여성들이 동경하는 여성이 됐다. 한국은 다소 촌스럽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일본 젊은 여성들이 이젠 한국의 걸 그룹 멤버들처럼 되고 싶어하기 시작한 것. 일본 음반 관계자들은 한국 걸 그룹들이 일본 진출 앨범에서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노래하는 것을 권유한다. 일본 아마존 사이트의 팬들 반응도 유사하다. 일본 젊은 층에서 한국어가 다소 촌스러운 언어로 받아들여졌던 분위기 역시 한국 걸 그룹 열풍으로 크게 달라져 이젠 불어처럼 멋있는 언어로 여겨지고 있다고.
일본에서 바라보는 한국 걸 그룹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실력이다. 노래와 춤 실력이 일본 걸 그룹의 그것을 확실하게 압도하고 있는 것. 일본 내 혐한류 네티즌들 역시 이 부분은 인정할 정도다. 일본 음반 관계자는 모닝구 무스메(Morning Musume)와 소녀시대를 비교해서 설명한다. 모닝구 무스메는 지난 97년 오디션전문 TV 프로그램 Asayan을 통해 데뷔했다. 오디션부터 연습과정을 거쳐 데뷔까지 방송을 통해 소개된 모닝구 무스메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일본 최고의 걸 그룹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오디션과 연습 과정을 모두 방송에 공개하며 데뷔한 이들이지만 노래와 춤 실력은 소녀시대과 카라에 떨어진다.
이런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는 있지만 한국 걸 그룹의 일본 활동이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 방송의 경우 가요 전문 프로그램이 거의 없어 한국 걸 그룹의 춤과 노래와 같은 퍼포먼스를 선보일 기회가 많지 않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꾸준히 라이브 무대에서 팬들을 직접 만나 자신들의 실력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방송을 통해 일본 팬들과 자주 접하기 위해선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 끼를 발산해야 한다. 일본 연예계의 경우 외모나 실력이 다소 부족할지라도 예능감이 뛰어나면 충분히 높은 인기를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걸 그룹 역시 일본 예능 프로그램에 많이 출연해 예능감을 선보이고 멤버 개개인이 고유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 일본의 인기 그룹이 대부분 이런 형태로 활동하고 있고 한국 가요계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역시 문제는 언어다. 다만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과 걸 그룹 멤버들이 해외 진출을 위해 꾸준히 외국어 공부를 해왔다는 부분은 호재다. 얼마 전 일본의 인기 스타 우에노 주리가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했을 당시 서현은 뛰어난 일본어 실력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극복해야 할 부분은 언어뿐이 아니다. 일본 유력 주간지 <주간문춘> 관계자는 “다소 비슷비슷한 노래가 많은 게 한국 걸 그룹의 한계가 아닐까 싶다”면서 “뭔가 조금만 지겨워져도 싫증을 금방 내고 늘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일본 대중의 특징을 놓고 볼 때 새로운 음악과 색깔을 꾸준히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칸노 토모코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