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이탈리아의 카스텔라네타에서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루돌프 발렌티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엉망이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의 편애는 발렌티노를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만들었다.
그의 방랑은 10대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파리에서 아파치 댄스(난폭한 스타일의 춤)를 배운 그는 자기 몫의 유산 4000달러를 가지고 18세에 뉴욕으로 건너갔다. 돈이 떨어지자 노숙자 생활을 하기도 한 그는 웨이터와 남창 생활을 하며 춤을 배웠다. 특히 탱고에 심취했고 카페에서 ‘택시 댄서’ 생활을 했다. 택시 댄서는 돈을 받고 유한마담들과 춤을 추는 직업으로,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제비족’이나 다름없었다.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춤 솜씨로 그는 뉴욕 사교계에서 곧 유명해졌고 수많은 여성들의 연인이 되었다. 송사에 휘말린 것도 이 시기였다. 블랑카라는 상류층 유부녀의 이혼 법정에 증인으로 서게 되었는데 이 사건 이후 그는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일종의 도피였는데 그곳에서 만난 노먼 케리라는 여배우의 권유로 할리우드에 진출한다.
그의 삶엔 항상 여성 후견인이 있었다. 블랑카가 그를 사교계의 스타로 만들었고 노먼 케리가 할리우드로 이끌었다면, 메트로 영화사의 제작자이자 작가였던 준 마티스는 루돌프 발렌티노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1917년, 22세 되던 해에 그는 첫 영화 <이혼 수당>(1917)에 댄서가 되어 단역으로 등장한다. 이국적 이미지의 배우들에겐 악당이나 건달 역할만 주어지던 시절, 그는 준 마티스의 눈에 들어 <묵시록의 네 기병>(1921)이라는 영화에 파격적으로 주연급에 기용된다. 여성을 유혹하는 예술가 역할을 맡은 그의 탱고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이 영화는 미국 사회에 탱고를 유행시켰다. 그에겐 ‘라틴의 연인’(The Latin Lover)라는 별명을 지니게 되었다.
여성들의 관심 속에서 배우로선 승승장구했지만 사생활에서의 여성 관계엔 항상 결핍이 있었다. 1919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깊은 슬픔에 빠졌던 발레티노는 연상인 진 애커라는 여배우와 결혼함으로써 위로받으려 했다. 하지만 진 애커는 레즈비언이었고 당시 그레이스 다몬드, 앨라 나지모바라는 여배우들과 삼각관계였다. 발렌티노는 이 사실을 모른 채 프러포즈를 했고 애커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혼했다. 동성애자 배우는 대중에게 외면받던 시절, 진 애커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위장용 결혼을 한 것이다.
애커는 첫날밤을 거부했고 결혼한 지 6시간 만에 부부는 별거에 들어간다. 법적으로 그들은 3년 동안 부부 관계를 유지했지만 실제적으로 ‘할리우드 사상 가장 짧은 결혼 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발렌티노는 새로운 사랑을 갈구했고, 1921년에 <춘희>에 출연했을 때 상대역인 앨라 나지모바의 친구이자 미술감독이었던 나타냐 람보바와 사랑에 빠진다. 당시 나지모바와 동성 연인 관계였던 람보바는 발렌티노와 이성 관계를 맺으며 멕시코로 갔다.
하지만 전처인 진 애커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발렌티노는 중혼 혐의로 감옥에 갔고 1만 달러의 벌금을 물고 풀려났다. 진 애커와 이혼 후 정식 결혼을 했지만 아이를 원하는 발렌티노를 람보바는 거부했다. 결국 그들은 3년 만에 이혼한다.
이후 실의에 빠진 발렌티노는 자살을 시도했고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냈으며 여배우들과의 스캔들이 터졌다. 무성영화 <벤허>(1925)에서 주인공 벤허 역을 맡았던, 당대 최고의 남성미 넘치는 스타였던 라몬 노바로와 동성애 관계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요부 캐릭터로 인기를 끌던 섹시 스타 폴라 네그리와 스캔들도 터졌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점점 공허해졌다. 수많은 여성 관객들을 열광시킨 남성 스타의 실제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극도의 애정 결핍 증세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다음 호에 계속)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