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에 나온 <족장· The Sheik>은 단순한 흥행을 넘어 루돌프 발렌티노가 문화적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랍계 부족장으로 등장한 그는 백인 여성을 치명적 매력으로 유혹하는데 이것은 미국 백인 사회의 여성들에겐 강한 판타지였다. 이 영화의 제목이었던 ‘sheik’라는 단어는 ‘매력적인 남자’라는 의미의 단어로 쓰이게 되었고 결국은 ‘호색한’이라는 의미가 되어 발렌티노의 또 하나의 닉네임이 되었다.
<혈과 사>(1922)에선 투우사로 등장하는데 시합에 나가기 전에 옷을 갈아 있는 과정에서의 노출 장면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시기에 그는 스튜디오와 엄청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돈 문제도 있었지만 스튜디오의 통제에 그는 저항했다. 영화 출연을 거부한 그는 시집을 내고 잡지에 라이프 스토리를 연재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화장품 브랜드의 홍보용 댄스 투어를 하기도 했는데 투어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프랑스에서 영화를 찍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때 두 번째 아내이자 미술감독이었으며 의상감독이었던 나타샤 람보바는 발렌티노와 함께 <후디드 팔콘 The Hooded Falcon>이라는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하지만 제작비의 대부분은 의상 비용으로 들어갔고 영화 제작은 재난을 맞았다. 결국 발렌티노는 아내가 영화 제작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스튜디오와 계약했고, 이 사실에 발끈한 람보바는 프랑스로 떠나 발렌티노의 장례식이 있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두 번의 결혼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발렌티노의 인기는 여전했다. <더 이글 The Eagle>(1925)에서 만난 여배우 빌마 뱅키와는 좋은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족장>의 속편인 <족장의 아들 Son of the Sheik>(1926) 제작에 돌입했다. 이 영화가 자신의 유작이 될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이 영화가 개봉된 후 그는 병원에 실려 갔다. 궤양이 악화되었고 대수술 끝에 그는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차 감염에 의해 그는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1926년 8월 23일.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뉴욕 거리에 10만 명의 여성 팬들이 운집한 그의 장례식은 거의 폭동에 가까워 수백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다. 폴라 네그리는 4000송이의 장미를 보냈고 여기에 팬들이 바친 수만 송이의 장미가 더해졌다. 자살설이 제기되기도 했고(이후 1970년대엔 독살설이 대두되기도 했다), 10여 명의 팬들이 따라서 목숨을 끊었다.
루돌프 발렌티노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여성 관객들의 영혼을 훔쳤던 최초의 아이돌이었다. 팬들은 그에게 자신의 누드 사진과 속옷과 연애편지를 보냈고 자신들의 판타지를 투영했다. 이것에 대해 발렌티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들은 내가 아니라 스크린 위의 내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다. 나는 단지 여성들이 자신의 꿈을 그리는 캔버스일 뿐이다.”
그는 남성적 매력으로 가득 찼지만 남성 우월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깔끔하게 자신을 다듬고 여성적인 액세서리를 즐겨 착용했던 그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결합된 ‘양면적 섹슈얼리티’가 대중들을 사로잡는다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스타였다. 그는 짙은 페로몬을 풍기는 성적 약탈자였으며 위험한 욕정의 화신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여성화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도로 경계해, 그가 미국 남성을 여성화시킨다며 “핑크색 분첩(pink powder puff)”이라고 비아냥거린 기자에게 권투 시합을 신청할 정도였다.
터프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상대방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윽한 눈빛의 배우, 루돌프 발렌티노. 그는 ‘댄디’(the Dandy·여성적 남성)의 표상이었으며 죽음으로써 대중의 광란을 몰고 왔던 할리우드 최초의 레전드 아이콘이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