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북한노동당 창건일(10월 10일)에 자택 욕실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황 전 비서의 사망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따라가 봤다.
10월 10일 오전 9시경. 황 전 비서의 자택 내에서 근무하고 있던 경호원은 평소와 다른 점을 인지했다. 이 시간이라면 잠에서 깬 후 자택 2층 원탁에 앉아 있어야 할 황 전 비서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호원은 즉시 침실로 올라가 방을 노크했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수상한 낌새를 차린 그는 9시 45분경 비상열쇠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황 전 비서는 침실 안에 위치한 욕실 욕조에서 좌욕을 하는 모습으로 숨져 있었다. 경찰은 외부침입이나 외상의 흔적이 없는 점을 미뤄 일단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로 추정했다.
하지만 사망 시점과 황 전 비서의 최근까지 건강상태 등에 미뤄 볼 때 석연치 않은 부분도 존재해 그의 사망원인을 둘러싼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관측된다. 우선 언론을 통해 알려진 그의 최근 근황은 ‘자연사’로 인한 사망에 의문점을 남긴다. 황 전 비서는 사망 직전까지(10월 6일) 대학생, 탈북자들을 상대로 두 시간가량의 강의를 진행할 정도로 건강했다. 황 전 비서를 지켜봐 온 측근들 역시 최근 만난 그의 모습을 회상하며 “사망 나흘 전 황 전 비서를 만났을 때만 해도 매우 건강하고 평상시와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며 “참석자들을 향해 열심히 살자고 격려도 하고 유머도 섞어서 말씀하실 정도였는데 갑작스런 사망 소식에 매우 당혹스럽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가 사망한 날이 우연찮게도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일이었다는 점도 의혹으로 떠오른다. 그가 숨을 거둔 오전 9시 경에는 평양에서 한창 축하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었고,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후계자 김정은이 행사장에 직접 참여해 경축하고 있었다. 황 전 비서의 사망시점이 조선노동당 창립기념일 행사 시작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이 왠지 석연치 않다는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황 전 비서가 북한 통치체제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여 김정일 위원장을 자극했다는 점도 북한에 의한 타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황 전 비서는 현 정부 출범이후 활발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 일본(2010년 3월~4월)으로 건너가 있는 동안 북한 통치체제에 대해 직설적인 비판을 하는 등 그동안의 침묵에서 벗어나 활발한 대북 비판전을 전개했다. 특히 그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김정은 3대 세습체제’에 대해서 굉장히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전략문제연구소 초청 강연에서 “(김정은) 그까짓 녀석이 무슨 소용이냐. 김정일 자체를 보면 그보다 못하면 못했지 잘할 게 뭐냐”고 비판했다.
▲ 안병정 강남경찰서장이 10일 오후 황장엽 씨 사망 원인 수사 브리핑을 하고 있다. 경찰서 측은 “현재까지 타살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전했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이처럼 황 전 비서의 대북 강경발언이 이어지자 정보당국 주변에선 북한이 조만간 황 전 비서에 대해 ‘손을 볼 것’이란 관측이 나돌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4월에는 북한이 ‘황장엽 암살조’가 남한에 투입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지난 4월 20일 검찰은 북한 정찰당국 소속 ‘황장엽 암살조’ 김명호와 동명관이 개입된 ‘암살계획’을 발표해 세간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이들은 검찰조사에서 ‘2009년 11월 김영철 정찰총국장으로부터 황장엽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받고 태국을 거쳐 지난 2010년 1~2월 경 국내로 잠입했다. 그 뒤 탈북자로 위장해 황장엽의 동향을 수집하는 등 암살 실행을 준비해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정원의 레이더에 걸려들었고, 사정당국의 조사 결과 그들의 신분이 발각돼 암살계획 등을 실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은 일단 현재까지는 자살이나 타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황 전 비서가 사망한 시기와 건강상태 등을 감안해 시신을 부검할 예정이다. 황 전 비서의 사망 원인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어떻게 결론이 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
김정일 개인선생, 남에 와선 독설
주체사상의 아버지’ ‘북한의 정신적 지주’. 황 전 비서를 이르는 말이다. 황 전 비서는 북한 사회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을 소련으로부터 이식해 온 장본인이다. 그는 1945~1949년 모스크바대학 철학과 재학 당시 익힌 이데올로기를 ‘주체사상’으로 체계화해 1970년 북한 사회에 옮겨 왔다. 그가 이식해 온 주체사상은 ‘김일성주의’로 발전됐고, 훗날 황장엽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지내며 어린 김정일에게 직접 통치 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개인강사로도 활동했다. 망명 직전(1997년 2월)까지 북한의 정신적 지주로 통하며 노동당 중앙위 국제담당 비서(당시 서열 26위),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등을 맡고 있었다.
북한 최고위 간부였던 그의 탈북은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1997년 그가 베이징에 위치한 한국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그의 남한 행은 ‘주체사상의 망명’이라고 불리며 큰 충격을 던져줬다. 북한사회는 즉각 언론을 통해 ‘남조선이 납치를 망명이라 속여 발표한 것’이라며 그의 변심을 믿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김일성 사상을 뿌리 뽑고 민주화 사상을 심기 위해 남한을 찾았다는 망명동기를 밝히며 자발적 탈북임을 발표했다. 그의 직접적인 망명 요인은 우리 정부가 사전에 그에게 ‘남한에서의 북한 민주화 운동 보장’을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내세운 ‘햇볕정책’과 함께 좌절돼갔다. 남북 관계를 긴장관계가 아닌 포용과 유화로 해결하겠다는 기조의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의 햇볕정책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북한 민주화 운동’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1999년부터 맡아온 탈북자동지회 명예회장의 직함으로 탈북자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것으로 활동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거처 및 근황은 정보당국의 통제 속에 철저히 가려졌다. 이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그는 대내외적인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