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악산 천불동계곡의 아름다운 단풍. |
누가 뭐래도 가을산은 설악이다. 빼어난 산세와 아름다운 계곡에 화룡점정 하는 단풍이 설악을 뒤덮고 있다.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지며 전국의 산객을 불러 모으는 가을의 진산. 제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인들 그 심장 떨리는 설악의 유혹을 견딜 수가 있을까.
여름이 참 길었다 싶었는데, 어느덧 바람이 바뀌고 가을이 찾아왔다. 소매를 끌어내리는 그 기운만으로 보자면 단풍도 금방 들 것으로 예상됐지만, 의외로 그 걸음이 더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단풍에 젖는다는 설악도 평년보다 9일, 작년보다 6일이 늦었다. 첫 단풍이 지난 5일에야 시작됐다. 단풍은 산정에서 아래쪽으로 20% 들었을 때 ‘시작’, 80% 들었을 때 ‘절정’이라 이야기한다. 설악의 단풍은 이번 주말을 기해 절정으로 치닫을 예정이다.
설악은 강원도 속초시와 고성군, 인제군, 양양군 4개의 시군에 걸쳐 있는 품 넓은 산이다. 주봉인 대청봉(1708m)을 필두로 700여 개의 봉우리가 곳곳에 솟아 진경을 연출한다. 한계령과 미시령 동쪽을 외설악, 서쪽을 내설악이라고 흔히 칭한다. 한계령 너머 양양으로 달리다보면 만나는 오색까지 끼워 남설악도 설악 지구 나눔의 한 부분으로 치기도 한다.
산행은 잡기 나름이다. 단풍 산행은 인제 쪽 백담사, 양양 한계령과 오색을 들머리로 삼는 게 일반적이다. 그 중 오색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짧고 시간도 덜 걸린다. 단풍철에는 운해가 자주 끼기 때문에 특히 오색 기점이 인기다. 새벽의 운해를 보려면 길을 서둘러야 하는데, 시간에 맞는다.
대청봉 등산을 시작하는 오색은 주전골에서 흘림골로 이어지는 가벼운 트레킹코스로도 좋다. 흘림골은 20년 동안 자연휴식년제로 묶였다가 2006년 개방된 꼽을 만한 설악의 비경이다. 오색-주전골-등선대-흘림골 구간은 6.2㎞ 거리로 오르내림이 있기는 하지만 무난한 편이어서 큰 부담은 없다. 빠른 걸음이면 2시간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이 구간에서 특히 등선대에서 바라보는 만물상 주변의 단풍이 아주 멋있다. 수도 없이 많은 기암들이 마치 죽순처럼 솟아있는 만물상 사이사이 알록달록 핀 단풍이 사람들을 홀린다. 이 구간의 등선폭포, 십이폭포 등도 볼거리다.
운해를 보기 위한 오색에서의 산행은 새벽 3시에 출발한다. 이때라야 입산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오색에서 대청으로 오르는 이 구간은 사실 단풍이 볼 만한 코스가 아니어서 깜깜한 산길을 오르는 데 대한 아쉬움이 없다.
빠른 걸음으로는 대청까지 3시간, 초보자의 경우는 5시간 가까이 잡아야 한다. 중간 지점은 설악폭포다. 약 1시간30분에서 2시간쯤 오르면 설악폭포에 닿는다. 위용은 그닥 없다. 돌계단이 다소 지겹다. 설악폭포에서 대청까지는 역시 1시간30분에서 2시간 걸린다. 이 구간이 쉽지 않다. 끊임없는 오르막이다. 경사도 급하다. 진을 빼고야 마는데, 그래도 참을 수 있는 것은 대청과 그곳에서 마주하게 될 운해 때문이다.
아래쪽만 해도 더위가 남아 있지만, 대청은 벌써 겨울에 들어섰다. 단풍도 다 떨어져 낙엽이 되고, 봉우리에는 서리만 무성하다. 오르느라 쏟았던 땀이 옷 속에서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에 자꾸만 몸이 움츠러든다. 바람이 많아서일까. 구름이 모여 바다가 되지 못 하고 흩어졌다. 운해라는 한 가지의 기대는 잃었으나 대청에서 바라보는 해오름의 풍경만은 잊을 수 없다. 구름이 없어 오히려 또렷이 잡힐 듯한 동해와 하늘, 남서쪽의 한계령 방면과 북서쪽의 용아장성과 공룡. 그것은 감동 그 자체다.
대청에서 하산은 설악동 쪽으로 한다. 천불동계곡의 단풍이 정말 좋은 까닭이다. 6시간쯤 소요된다. 그러나 장담할 수는 없다. 단풍에 빠지다보면 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난다. 중청과 소청을 거쳐 희운각대피소까지 단숨에 내려간 후 고민에 빠진다. 하이라이트인 공룡을 타고 넘은 후 마등령기점 지나 설악동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천불동계곡 쪽으로 내려갈 것인가. 공룡을 타고 넘는 코스는 마등령기점까지 5㎞ 거리인데, 단내가 나도록 몰아붙이는 험한 돌길이 5시간 이상 잡아먹는다. 그게 선택을 돕는다. 마등령에서 비선대를 거쳐 설악동 신흥사까지 다시 4~5시간을 걸어야 하겠기에 아무래도 무리라는 판단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단풍이다. 공룡의 위용과 기암들의 형세를 두고 감이 못내 걸리지만, 그래도 단풍은 역시 천불동이다.
천불동계곡은 설악을 대표하는 골짜기다. 희운각대피소를 내려서면 시작되는 이 계곡에는 양폭포음폭포, 오련폭포, 귀면암, 이호담, 문주담 등 비경들이 연속으로 이어진다. 희운각대피소는 1969년 2월 14일 한국산악회 소속 제1기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훈련하던 중 눈사태로 10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를 당하게 되는데, 산악인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희운 최태묵(1920~1991) 선생이 다시는 그런 사고가 없도록 사재를 털어 세운 것이다.
희운각대피소에서 내려오는 동안 오른쪽으로 보이는 화채능선 아래의 단풍이 왜 그 길을 택하지 않았느냐 질책을 하는 듯하지만, 1000개의 불상이 서 있는 듯 끝도 없고 셀 수도 없는 기암들이 모여 있는 천불동계곡의 단풍은 제대로 왔다고 한다. 대피소에서 내려와 무너미고개 갈림길을 넘어서면서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단풍은 천불동계곡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화염이 짙어지며 가을의 찬란함을 노래하고, 그 속에 든 사람은 그간 쌓인 스트레스와 근심이 모두 타버리며 마음이 정화된다.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천불동의 단풍은 단순히 붉기만 한 것이 아니다. 노랗고, 빨갛고, 게다가 곳곳에 남은 연두와 초록까지 그 색깔의 스펙트럼이 정말 넓다. 햇빛 눈부신 날, 이 색깔들이 벌이는 잔치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
여행안내
▲길잡이: 서울→6번국도→양평→44번국도→홍천, 인제→한계령→오색. ▲먹거리: 설악산 자락의 한 고을인 양양은 송이로 유명한 곳이다. 송이는 kg 당 20만원을 호가하는 값비싼 몸이다. 제 아무리 비싸고 좋은 재료라도 그걸 제대로 요리하지 못 한다면 소용없는 일. 다행히 양양에는 ‘양양송이버섯마을(033-672-3145, 양양읍 월리 226-5)’, ‘송이골(033-672-8040, 손양면 송현리 234-1)’ 등 제대로 송이맛을 내는 집들이 있다. 두 곳 모두 조미료를 쓰지 않고 간도 세지 않아 송이 본연의 깊은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잠자리: 오색약수터 부근에 숙박업소들이 많다. 그린야드호텔(033-670-1000), 설악온천장(033-672-2645) 등 온천을 겸하는 곳들이 대부분이다. 이곳에서 잠을 잘 경우 온천욕을 무료로 할 수 있다. ▲문의: 설악산국립공원(http://seorak.knps.or.kr) 033-636-7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