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스미르노프 IOC 위원과 기념 촬영을 했다. |
그는 1935년 시베리아의 하바롭스크(Khabarovsk)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자주 시베리아로 곰 사냥을 가기도 하고, 필자에게는 곰 쓸개를 갖다주곤 했다.
그는 모스크바의 사회과학대학교의 체육교육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수영, 수구(Water-polo), 테니스, 복싱을 했고, 1970년에서 1975년까지 소연방 체육성의 제1차관, 1981년부터 1990년까지 러시아공화국(대통령 옐친)의 체육장관, 1990~1992년 소련 NOC 위원장, 1992~2001년까지 러시아 NOC 위원장도 지냈다. 소연방 붕괴로 체육에 대한 소련의 강력한 국가지원체제가 없어지자 스미르노프는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 러시아 NOC를 소생시키기 위해 무척 고생을 했다.
그의 진가는 제22회 올림픽, 즉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조직위원회(위원장은 노비코프)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드러났다. 앞서 1971년에 IOC위원이 된 바 있는 그는 대부분의 올림픽조직위원회가 장(長)은 정치지도자가 맡고 실제 실무책임은 수석부위원장이 도맡아 처리하듯 모스크바올림픽의 많은 중요한 임무를 완수했다.
▲ 서울을 방문한 스미르노프 IOC 위원 부부를 위해 만찬을 열었다. |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의 카터(Carter) 대통령이 각국에 올림픽 보이콧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의 IOC 위원장인 킬라닌(Killanin) 경이 카터 대통령을 만나러 가기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부터 올림픽 보이콧의 역사가 시작됐고, 88서울올림픽 때도 국교가 없는 소련 등 동구권의 보이콧 방지를 위해 무척 노력해야 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때 정치적인 이유로 한국 등 참가를 하지 않은 나라도 있었지만 정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참가한 NOC도 있었다. 영국이 대표적인 예인데 현재 2012런던올림픽 조직위원장인 세바스찬 코(Sebastian Coe)가 당시 육상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서방의 보이콧으로 킬라닌 위원장은 참가국 수를 60개국 정도 예상했는데 결국 81개국 5000명이 참가했다. 반쪽 올림픽이지만 일단 시작하니 올림픽은 역시 올림픽답게 빛이 났고, 소련은 사회주의국가로는 처음으로 국력을 과시했다. 또한 IOC총회에서는 킬라닌(Killanin)의 뒤를 이어 사마란치가 IOC 위원장에 당선되어 올림픽 중흥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사마란치에게 아디다스의 다슬러(Dassler) 회장이 상당한 지원자금을 썼다고 한다. 또 모스크바 IOC총회에서는 세계태권도연맹(WTF)이 IOC승인단체가 되었다.
이 무렵 IOC의 자금은 고작 100만 달러 정도였다. 이때부터 사마란치는 재정파탄 위기에 처해 있던 IOC를 본격적으로 마케팅(Marketing)하기 시작해 오늘날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키워냈다. 모스크바올림픽 때 미국의 NBC 방송이 8000만 달러(76년 몬트리올올림픽은 미국 ABC가 2500만 달러)에 TV방영권계약을 했지만 미국의 보이콧으로 방영권이 취소되어 큰 손해를 봤다. 이 때문에 88년 서울올림픽의 TV방영권 교섭이 미국 NBC의 각종 까다로운 보장 요구로 고전하게 된 것이다.
▲ 크렘린궁전에서 만난 이그나텐카 대변인, 필자, 스미르노프 IOC위원(왼쪽부터). |
서울올림픽 준비기간에 스미르노프는 그라모프(Gramov) 장관, 가브릴린(Gavrilin) 차관에 눌려 상당히 조심성 있게 행동했다. 그러면서도 서서히 IOC를 통해 기지개를 폈고, 러시아의 정치적 격동기에도 살아남았다.
서울올림픽 준비 차 모스크바에 갈 때마다 공식적으로는 소련 체육성이 교섭 창구였지만 개인적으로 스미르노프의 인맥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문화성, 방송위원회 등이다. 타스(Tass)통신 사장이고 고르바초프(Gorbachev)의 공보비서가 된 이그나텐카(Ignatenka)도 그의 친구다. 스미르노프는 이때 옐친(Yeltsin)이 이끄는 러시아공화국의 체육장관이었는데 얼마 안 가서 옐친의 러시아공화국 정부 개편으로 자리를 잃었다. 소련이 공산체제에서 냉전을 거쳐 옐친, 푸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실각하고 큰 변천이 있었지만 스미르노프는 노비코프(Novikov)를 도와 모스크바올림픽을 성공시켰을 뿐 아니라 그 후 러시아 NOC 위원장도 맡아 소련붕괴 이후 ‘민주 자율 NOC’ 재건에 성공했다. 필자와는 여러 가지로 협조관계를 계속 이어왔다.
2002 솔트레이크동계올림픽 유치를 전후해서 소련은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워졌고, 모두들 서방국가로 나오려 했다. 스미르노프는 필자가 미국에 아는 사람이 많을 터이니 자기 친구의 여식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소개를 해줬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솔트레이크 사건 때 입에 오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전화가 왔다. 자기는 너무 공격의 목표가 되어있어 그것까지 표면화되면 더 어려우니 자기 부탁이라고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관계없는 필자가 뒤집어썼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태권도가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되어 경기를 관장하고 있는데 스미르노프로부터 전화가 왔다. 중국과 러시아가 결승에 맞붙었는데 금메달 수가 모자라니 러시아가 이겼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필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결국 중국이 금, 러시아는 은이 돼 버린 바 있다. 시드니는 서울올림픽 때 러시아가 1위, 동독이 2위, 미국이 3위를 할 때와는 달랐다. 국가가 돈을 대다가 고르바초프 체제의 재정파탄으로 NOC도 스폰서를 잡아야 운영이 가능한 처지가 된 것이다. 아이스하키 등 우수한 선수는 모두 미국 프로팀으로 가버리고 스폰서도 붙지 않고 스미르노프 혼자 악전고투를 했다. 그는 올림픽의 프로화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사마란치가 애틀랜타올림픽에 미국농구 NBA의 드림팀을 출전시키려 했을 때 강력히 반대했다. 보통 선수와 경쟁이 안 되는 불공정하고, 올림픽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리를 추구하는 사마란치에게 이것이 통할 리 없었다.
88올림픽 때 김대중 평민당 대표가 자오즈민과 안재형의 결혼성사를 사마란치에게 부탁했듯이 88올림픽 후 한국인 최초로 피아니스트 김혜정(필자의 딸)을 모스크바 음대에 유학을 보내는 데도 국교가 없는 상태라 사마란치가 소련문화성에 요청하고 스미르노프가 대부 역할을 했다. 김혜정이 소련문화성 오케스트라와 로즈데르벤스키(Rozdervensky) 지휘로 CD녹음을 한 것도 스미르노프가 노력한 결과였다.
스미르노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일은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때 발생했다. 즉 스미르노프의 무게 있는 역할이 올림픽운동을 살리고, 실패로 낙인 찍힌 로게(IOC 위원장) 주도의 첫 번째 올림픽을 살린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렇다. 한국이 김동성 사건으로 보이콧 얘기가 나올 때였는데 러시아는 피겨스케이팅 페어종목에서 프랑스 조의 감정적인 호소와 읍소로 금메달을 놓고 큰 갈등을 빚었다. 이게 문제가 돼 며칠을 끌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솔트레이크올림픽을 비난했다. 러시아팀이 즉각 철수하고 아테네올림픽에 불참한다고 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한국팀도 솔트레이크올림픽폐회식에 불참한다는 소문이 돌아 IOC 위원장인 로게를 긴장시켰다. 필자는 로게의 청으로 ‘한국은 지금까지처럼 성공적인(These Succesful) 올림픽 폐회식에 참가한다’는, IOC가 초안을 잡은 성명서를 발표했다가 무엇이 성공적이냐고 MBC 등 한국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사실 우방 미국에서 9·11테러 직후에 열린 올림픽이고, 특히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신중해야 했다. 호주심판의 부당판정을 합법적으로 ISU와 IOC에 항의하고, 시정조치를 기해야지 보이콧을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푸틴은 솔트레이크올림픽을 행정편파와 상업주의로 인한 실패한 대회라고 공격하고, 러시아의 여당은 선수를 귀국시키고 러시아의 알루미늄 회사 루살(RUSAL)은 법적소송을 건다고 협박했다. 이때 그 모든 것을 완화, 진정시킨 것이 당시 NOC 위원장은 아니었지만 IOC 위원이었던 스미르노프였다. 이때 스미르노프는 한국과 공동전선을 펴기 원했는데, 한국의 성명서 발표는 러시아가 보이콧을 안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나중에 로게는 필자가 솔트레이크올림픽을 살렸다고 공언까지 할 정도였다. 로게는 신속히 움직여 캐나다에도 금을 주고 실격된 러시아의 크로스컨트리 선수가 실격 전에 딴 은메달 2개를 회복시켰다.
2007년 로게는 크렘린(Kremlin)에 초대받아 갔다. 과테말라 총회에서는 직접 참석한 푸틴이 원하는 대로 소치가 한국의 평창을 제치고 2014년 동계올림픽을 따갔다. 앞서 소치도 1990년에 이미 한 번 후보도시로 나온 적이 있다.
얼마 전 스미르노프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미 삼아 들으라”며 모스크바에서 한국 외교관이 찾아와서 평창지지를 호소하기에 “너희 나라에 IOC 위원의 대부분의 존경을 받고, 또 많은 외신기자들의 존경을 받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분이 있는데 왜 거기 가서 요청하지 자기에게 와서 말하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이 외교관은 서울에 보고하겠다며 갔는데 이것을 스미르노프는 코미디라고 했다.
한참 전에 모 정부 고관이 문화행사로 모스크바를 가는데 스미르노프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전화를 걸었더니 스미르노프는 소치(Sochi) 회의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필자가 “좀 올라오라”고 요청했더니 밤에 올라와 그 다음날 한국 고관을 영접해 주었다. 그렇게 급하게 만났는데 별 이야기는 없고 인사예방이었다고 했다.
스미르노프는 IOC 집행부에서 근 20년 봉사했고 소련의 국가체제 스포츠를 맡아 모스크바올림픽을 성공시켰다. 소련의 국책대로 임무를 잘 수행한 것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민주 러시아의 스포츠를 연착륙시켰고 러시아가 원하던 하계올림픽에 이은 소치동계올림픽을 20년 걸려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IOC 내에서 아직도 영향력이 지대하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