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카’라는 이름과 그 미모에 가려 있긴 하지만 1980년대 한국영화의 에로티시즘이 만개하기 전 정윤희는 가장 관능적인 여배우 중 한 명이었다. 1970년대 후반 이른바 ‘호스티스 멜로’의 헤로인이었으며 1980년대 초 토속 멜로인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1)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에서 그녀가 보여준 야생의 섹슈얼리티는 지금 40대 중반 이후의 남성들에겐 잊지 못할 이미지일 것이다.
1954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난 정윤희는 부산 혜화여고를 졸업한 후 서울로 상경, 연기자를 꿈꾸다가 1975년 이경태 감독의 <욕망>으로 데뷔한다. 이때 그녀에게 다가온 행운은 <청춘극장>(1975)에 캐스팅된 것. 일제시대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청춘들의 모습을 그린 김래성의 소설은 1959년에 처음 영화화되어 김지미를 스타덤에 올려놓았고, 1967년에 두 번째 영화에선 윤정희를 데뷔시켰다. 그리고 1975년에 세 번째 영화화되었는데, 사실 원래 여주인공은 정윤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때 이른바 ‘6·10 스캔들’이 터졌다. 재벌 2세의 외화 밀반출 사건이 빌미가 된 이 사건은 여러 여배우들이 그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드러났고 그들 중엔 공개 오디션을 통해 <청춘극장>의 여주인공으로 선발된 여배우도 있었다. 그녀는 하차해야 했고 정윤희는 대신 주연을 맡아 스타덤에 다가섰다.
정윤희는 연기파 배우는 아니었다. 데뷔 초기엔 발랄한 청춘과 CF 이미지였던 그녀는 장미희와 함께 TV 드라마 <청실홍실>에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오르는데 1978년엔 호스티스 영화인 <나는 77번 아가씨>로 스크린에서도 흥행을 기록한다. 이후 TV와 은막을 종횡무진하다 은퇴 전까지 연예인 소득 순위에서 10위권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으며, 1982년엔 스타 파워를 앞세워 방송사의 탤런트 전속 제도를 폐지시키는 데 선두 주자가 된다(그녀는 KBS에서 MBC로 이적한다).
글래머도 아니고 육감적인 느낌을 지니지도 않았지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큰 눈과 아담하지만 탄력 있는 몸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흐르는 백치미는 정윤희를 성적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운명에 휩싸여 희생되거나 기구한 삶을 사는 여인이었다. 아버지의 빚 때문에 불행한 결혼을 한 <나는 77번 아가씨>의 호스티스, 다방 레지가 된 <꽃순이를 아시나요>(1979)의 산골 처녀,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와 소아마비 동생을 둔 <죽음보다 깊은 잠>(1979)의 가난한 처녀 등등.
리스트는 계속 이어진다.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괴로워하는 <도시의 사냥꾼>(1979)의 목사 딸, 재혼한 남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강변부인>(1981)의 가정 주부, 기지촌 양공주의 딸로 나온 <사랑하는 사람아>(1981), 부자의 정부로 살아가는 <춘희>(1982)의 창녀, 불우한 환경 때문에 호스티스가 된 <진아의 벌레 먹은 장미>(1982),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사생아를 낳고 불치의 병으로 죽는 <여자의 함정>(1982), 애인의 친구에게 강간당하는 <여자와 비>(1982) 등등. 아마도 그녀처럼 스크린에서 기구한 삶을 살았던 배우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에선 근친상간 관계 속에서 고통받고 주변 남자들로부터 강간 위협을 받으며 결국을 죽고 마는 순박한 시골 처녀로 등장했다. 특히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의 계곡 폭포 장면은 당시로선 아찔했던 장면으로, 정윤희만이 표현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의 극치였다.
하지만 1984년에 간통 사건에 휘말리고 그해 12월에 결혼하면서 그녀는 서른 살의 나이에 은퇴의 길을 걷는다. 단 10년여의 활동만으로 최고의 스타덤에 올랐고, 최고의 위치에서 보수적인 법 제도에 의해 배우의 삶을 포기해야 했던 배우 정윤희. 함께 트로이카 시대를 구가했던 유지인과 장미희가 아직도 건재한 것을 보면 그녀의 이른 은퇴가 더욱 아쉬워진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