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일 중국 광저우 아오티 구장에서 열린 광저우아시안게임 야구 결승 한국과 대만의 경기에서 한국팀 선수들이 금메달이 확정되자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선수들은 ‘방콕 중’
프로들로 구성된 도하아시안게임 당시 대표팀은 다른 종목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경기만 끝나면 외출하기 바쁘다”는 핀잔을 들었다. 어느 선수는 “밤의 사나이”란 별명을 달기도 했다. 실제로 몇몇 선수는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도하의 밤거리를 배회했다는 의심을 샀다. 여기다 대표팀의 중심타자였던 이병규는 경기에 지고서 바로 버스에 타지 않고, 내야 관중석의 그물망을 타고 올라가 치어리더들에게 사인을 해준 바람에 구설에 올랐다.
그렇다면 광저우는 어땠을까. “선수들이 방콕에 온 줄 아는 모양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 관계자의 말이다. 여기서 방콕은 지명이 아니다. ‘방에 콕 틀어박혀 나올 줄 모른다’는 뜻이다. 사실이었다. 대표팀 선수들은 경기장과 선수촌만을 오가는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기자들이 인터뷰하고 싶어도 선수촌 밖으로 나오는 선수가 없어 죄다 무산됐다.
“괜히 밖에 나갔다가 지기라도 하면 패배의 원흉이 될 수 있다”는 게 선수들이 털어놓은 ‘방콕’의 이유였다. 한 선수는 묘한 이야기를 했다. “광저우에 오기 전 부산에서 훈련할 때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이 선수단에 알려지며 코칭스태프로부터 ‘특별히 처신을 잘하라’는 주의를 들었다.”
대표팀의 한 관계자는 “어쨌거나 소문 때문에 선수들이 딴 데 한눈 팔지 않고, 훈련에만 열중했다. 소문이 이렇게 고맙기는 처음”이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 야구교본 ‘추신수’
“우리와는 격이 달라요. 지구인이 아니에요. 화성에서 왔을 거예요.”
대표팀의 한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몸을 푸는 추신수를 가리키며 귓속말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험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표정엔 경외심이 넘쳤다. 유격수 강정호는 “같은 야구선수지만, (추)신수 형을 보면 진짜 야구선수 같다는 생각이 든다. 훈련부터 기술, 정신력, 몸 관리 등 어디 하나 놓칠 게 없는 ‘걸어 다니는 야구교본’”이라고 추신수를 극찬했다.
류중일 대표팀 수비코치는 추신수의 매력에 푹 빠졌다. 애초 류 코치는 “추신수가 메이저리거라 다소 도도하고, 자기주장이 강할 줄 알았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코칭스태프의 지시를 잘 수용하고, 먼저 동료선수들을 배려하고 챙기려는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고 말했다. 류 코치가 내린 결론은 “추신수는 야구 능력만큼이나 인간성도 참 좋은 친구”라는 것이었다.
선수들의 증언으로는 야구 장비를 챙겨 가장 먼저 버스에 올라타는 이는 다름 아닌 추신수였다. 경기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몸을 푸는 이도 추신수였다. 그날 경기를 복기하고, 다음날 경기를 가장 진지하게 대비하는 이도 항상 추신수였다고.
추신수는 대표팀의 합숙훈련지였던 부산에서부터 동료선수들의 “놀러 가자”는 꾀임(?)을 정중히 거절하고 훈련에만 매진했다. 그래서일까. 선참급의 한 선수는 후배 선수들에게 “‘수신제가’라는 말 대신 앞으로 야구선수들은 ‘추신제가’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서 “추신수처럼 몸을 잘 다스리고, 노력하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고 몇 차례나 강조했다고 한다.
# 그림자 감독의 힘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는 대표팀 감독의 비중이 어느 국제대회보다 작았던 대회였다. 이유가 있었다. ‘도하 참패’를 경험한 야구계는 이후 대표팀 선수선발권한을 감독에게 일임하지 않았다. KBO 산하에 기술위원회(위원장 김인식)를 신설해 이곳에서 대표팀 자원을 꾸준히 관리하고, 선발하도록 했다. 이번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선수 대부분은 기술위의 회의를 통해 뽑혔다.
물론 최종결정권자는 이번에도 조 감독이었다. 그러나 감독이라도 기술위가 뽑은 선수 가운데 불만족스러운 선수가 있거나 꼭 뽑고 싶은 선수가 있으면 합리적인 이유를 대도록 했다. 조 감독은 기술위의 선발 원칙을 존중하는 뜻에서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표팀 최종선발명단이 발표됐을 때 ‘누구누구는 기량이 떨어지데도 감독의 소속팀 선수라 뽑혔다’라는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상대국 전력분석도 감독의 감에 의존하지 않았다. 김인식 기술위원장은 일찌감치 전력분석팀을 조직해 일본, 타이완으로 전력분석원들을 파견했다. 이들은 상대팀 주요 선수들의 기록뿐만 아니라 작은 버릇까지 파악해 100페이지가 넘는 전력분석 보고서를 작성했다. 유남호 씨가 이끄는 대표팀 전력분석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 코칭스태프는 경기를 준비했고, 좋은 성과를 거뒀다.
한국의 금메달이 확정되고서 일부 야구인은 조 감독을 “누가 사령탑이 됐어도 우승할 대회에서 우승한 감독이었다”고 평했다. 어느 야구해설가는 “대회 기간 중 조 감독이 한 일이라곤 고작 희생번트 지시밖에 없었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같은 전력으로도 한국은 도하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광저우로 떠나기 전, 조 감독은 대표팀 선수들을 부산으로 소집했다. 그리고 강훈련을 받도록 했다. 선수들이 “스프링캠프보다 훈련이 더 고되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훈련이 없었다면 한국 투수들은 마운드 위에서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뿌리지 못했을 것이다. 결승에서 대만 강타선을 잠재운 윤석민은 “정규시즌이 끝나고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렸지만, 강도 높은 합숙훈련으로 정규시즌 못지않은 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조 감독은 새로운 대표팀 사령탑의 전형을 보여줬는지 모른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