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파리에서 그녀의 본명은 카트린느 돌레악. 아버지 모리스 돌레악은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던 배우였고, 르네 드뇌브는 딸들을 통해 못다 이룬 배우의 꿈을 이루려 어린 두 딸을 촬영장으로 내몰았다(카트린느 드뇌브는 데뷔 후 어머니의 성을 사용했다). 13세에 데뷔했지만 언니인 프랑소아즈의 들러리였던 카트린느는 깡마르고 눈만 큰 소녀였다. 이후 어느 댄스파티에서 춤을 추고 있던 그녀를 발견한 사람은 바로 로제 바딤 감독이었다. 이때 카트린느의 나이는 18세였다.
브리지트 바르도와 헤어지고 덴마크의 여배우 아네트 스트로이버그와 재혼했지만 또 다시 이혼했던 로제 바딤은 10대 무명배우 드뇌브에 첫눈에 반했고 둘은 만난 지 하루 만에 미래를 약속하는 관계가 되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름 드뇌브는 로제 바딤의 아이(크리스티안 바딤)를 낳는다. 하지만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은 상태. 바딤은 결혼을 망설였고 드뇌브는 그해 겨울 바딤을 떠난다.
홀로 된 드뇌브는 자크 드미 감독의 뮤지컬 <쉘부르의 우산>에서 여주인공 쥬느비에브 역을 맡으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것 같으면서도 요부 같은 섹시함이 은밀히 숨겨져 있으며 글래머와는 거리가 멀지만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인 구석도 있는 그녀의 다중적 이미지는 몇몇 감독들의 관심을 끌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순진한 처녀 같지만 매우 섹시하다”고 드뇌브를 평하며 <반항>(1956)에서 그녀를 강간의 환각 속에 살인을 저지르는 여성으로 만들었다.
루이 브뉘엘 감독의 <세브린느>(67)에서 드뇌브는 상류층의 부유한 여인이지만 오후만 되면 매춘굴에서 몸을 파는 창녀로 변한다. 이 영화에서 얻은 그로테스크한 관능미의 이미지는 이후 그녀를 계속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사생활에서 몇 번의 굴곡을 겪는데 1965년에 사진작가 데이비드 베일리와 결혼했지만 1971년에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 사랑에 빠지면서 이혼했고,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의 사이에서 키아라 마스트로얀니를 낳았지만 결혼하지는 않았다.
드뇌브의 섹슈얼 이미지는 토니 스코트 감독의 <악마의 키스>(1983)에 출연하면서 극에 달한다. 드뇌브는 단지 뱀파이어 이야기에 대한 흥미 때문에 <악마의 키스>에 출연했다. 상대역은 수잔 서랜든과 데이비드 보위(그는 1980년대 유니섹스 모드를 주도했다). 이 영화에서 드뇌브는 서랜든과 과감한 레즈비언 신을 공연하는데 당시 레즈비언 공동체는 <악마의 키스>의 드뇌브를 새로운 레즈비언 패션으로 떠받들었다.
기존 영화 속의 레즈비언 이미지가 모두 남성적이었다면 드뇌브는 너무나 아름다운 레즈비언 타입을 만들어내며 1980년대식 레즈비언 스타일의 장을 열었다. 사실 <세브린느>에서도 약간의 레즈비언적 암시를 주었던 드뇌브는 <지그지그>(1974)에서 레즈비언 매춘부로, <듣고 봐라>(1978)에서는 양성애적인 사립탐정으로, <도둑들>(96)에서 여제자와 사랑에 빠지는 철학교수였다. 1990년대엔 아예 <드뇌브>라는 제목의 레즈비언 잡지가 창간될 정도로 그녀는 동성애 아이콘으로서 컬트적 추앙을 받았다.
“내 나이보다 늙는 것을 원치 않지만, 나이를 먹어가는 현실을 거스르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지만, 드뇌브는 아직도 20대의 열정이 숨 쉬는 것을 느낀다고 속삭인다. 프랑스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지만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국민 배우’ 같은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 일탈과 위반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로제 바딤의 말처럼 ‘비밀이 많은 여자’였고,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말처럼 ‘결론지을 수 없는 애매함과 이중성을 지닌’ 야누스 같은 배우 카트린느 드뇌브. 70세를 향해 가고 있는 그녀는 아직도 현역이며 여전히 우아하고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