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전량 IOC 위원(가운데)이 태능선수촌을 방문한 모습. |
허전량 하면 서울올림픽을 통해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초야의 보잘 것 없던 중국이 경제발전과 함께 거대한 세계 최고의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중국의 공자(孔子)를 떠올리게 하는 전형적인 중국식 국제 신사다.
허전량은 1929년 중국 저장(浙江)성에서 출생, 상하이의 오로르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연구하고 잠시 국제문제와 언어학 교수를 지냈다. 영어보다 프랑스어를 더 잘해 IOC에서 발언할 때는 프랑스어로 할 때가 많았다. 한때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불어 통역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인은 신화사(新華社) 기자 겸 작가다.
그는 탁구, 테니스, 수영, 골프 등을 했지만 필자와 가까이 지내면서 태권도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특히 우슈와 비교해서 토의를 하는 걸 즐겨했다. 태권도의 기적적인 세계화를 우슈도 모방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적성 국가였던 중국이 한국과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88서울올림픽이었다. 88올림픽 덕에 86서울아시안게임에도 중국이 임원, 선수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허전량과의 본격적인 관계는 그가 81년 바덴바덴에서 중국인 최초로 IOC 위원이 되면서 시작됐다. 중국의 중요성을 내다본 사마란치가 중국을 ‘올림픽 가족’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고수의 하나였다. 사마란치는 중국을 보이게, 안 보이게 지원했다. 참고로 86아시안게임 때는 중국선수단 도착 직전에 김포공항에 폭발물이 터져 긴장한 일이 있었다. 86아시안게임에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가 모두 불참할 때 중국은 참가해줬던 것이다.
▲ 1993년 한·중 NOC 체육교류협정 서명식에서 허전량 위원과 필자가 사인하고 있다. |
서울아시안게임에서는 중국과 서울이 금메달 몇 개 가지고 1~2위를 다투었고 의외로 서울올림픽에서는 우리가 금 12개인데 중국은 금5, 은11, 동12밖에 못 땄다. 중국은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을 알게 되고 교역에서 외교관계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스포츠도 오늘의 세계 최강을 향한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으로 감지되었다.
서울올림픽 이전에 왜 소련과 동구권만 가고, 중국에는 안 오느냐고 하기에 서울올림픽 중국팀 참가문제 등을 협의할 겸 북경에 갔다. 리멍화(李夢華) 체육장관의 환대를 받고 만리장성과 자금성을 관광하고 그 규모에 놀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국이 아직 국제화의 길을 내딛기 전이라 공산국가 체제의 폐쇄된 경직성이 그대로 느껴졌다. 베이징에는 자동차가 5000대밖에 없고 중국 전체에 자전거가 7억 대나 되었다. 아침에 천안문 광장이 자전거로 메워지듯 하는 광경은 가히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서울올림픽에는 리멍화, 허전량이 이끄는 441명의 선수단과 신화사, CCTV, 북경시 임원 등이 참가했다. 88서울올림픽 기간에도 사고를 일으키는 선수단이 많았는데 가장 처신이 좋았던 선수단이 일본과 중국이었다. 서울올림픽 기간에 참가임원들을 편하게 하는 것도 나의 임무이기에 리멍화, 허전량 등 중국대표단을 푸짐하게 신라호텔 콘티넨탈에서 대접했고 이때 시작된 관계가 지금까지 여러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허전량은 필자와 나란히 IOC 부위원장을 하면서 집행위원회에서 10여 년간 같이 일을 했다. 그는 늘 중국의 국익뿐 아니라 아시아의 권익 보호라는 입장에서 나와 협조하였다. 참고로 86년, 88년은 아직도 중국을 중공(中共)이라고들 부를 때였다. 서울에 있을 때 중공이라고 하면 펄쩍 뛰었다. 중공이 아니고 중국(中國)이라는 것이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1990년 도쿄의 뉴오타니호텔에서 IOC총회가 있었고 허전량은 북경아시안게임 개회를 앞두고 IOC 위원들을 맞이하기 위해 하루 먼저 갔다. 그는 미리 “북경반점이 옛날 시설 그대로라 거기에는 아시안게임에 온 NOC 손님들을 넣고, IOC 위원들은 귀빈루라는 홍콩의 헨리 폭(Henry Fok, Timothy Fok IOC 위원의 아버지)이 투자한 호텔에 투숙한다”고 설명했다. 도쿄에서 중국이 보내온 전용기로 베이징공항에 도착했는데 입국수속에 IOC 위원을 한 시간씩 기다리게 했다. 외무성 직원이 한 사람씩 붙었는데 말도 잘 안 통하고 차량이 없어 어디를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었다. 여권도 나중에 방으로 전해주었고 호텔에서 국제전화도 잘 안 되어 스미르노프 등 동구권 IOC 위원의 불평이 대단했다. 북경아시안게임에는 한국이 차량 150대를 기증했지만, 정작 중국은 북한과의 동맹을 과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회식 귀빈석에는 양상쿤 주석, 덩샤오핑, 장쩌민 당서기장 등이 앉아 북한의 김영순 등 고관을 각별히 맞이했다. 다행히 필자는 허전량과 북경 부시장 장백발 덕에 그들 바로 뒤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아시안게임 같은 국제경기를 치른 적이 없었고, 국제화도 덜 되어 소련이나 동구권 IOC위원들이 “올림픽은 무슨 올림픽이냐?”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올림픽유치운동은 이미 태동하고 있었다. 1993년 허전량과 필자가 중국과 한국의 올림픽위원장을 맡게 되어 한중수교에 이어 한중올림픽위원회간의 교류협정도 체결했다. 함께 나가자는 것이었다. 부산아시안게임 유치에는 허전량과 우샤오조 장관이 많이 도와주었다.
<친진 청년>지에 중국은 언제 올림픽에 참가하는가? 언제 국가로서 대표단을 보낼 수 있는가? 언제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나? 하는 글이 게재된 것은 쑨원의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3년 전 1908년이었다. 첫 번째 목표는 1932년에, 두 번째는 1952년에, 세 번째는 2008년에 이루어졌다. 꼭 ‘100년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올림픽은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이 1990년에 개최되기 1년 전인 1989년에 덩샤오핑이 아시안게임 준비사항을 시찰하면서 “이 정도면 왜 올림픽을 개최 안 하는가”라는 말을 한 데서 시작되었다.
▲ 1995년 상하이 제1회 동아시아경기대회 기간 중 필자의 저서 <위대한 올림픽> 중국어판 출판기념회. |
그러나 중국은 2000년 올림픽유치에서 민주화 물결, 천안문사태 등에 발목이 잡혔다. 1993년 몬테카를로 IOC총회에서 허전량이 북경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난청 부총리를 단장으로 천시통 북경시장, 우샤오주 체육장관과 함께 사마란치의 후원을 받으며 전력투구했으나 역부족으로 시드니에 패배했다. 이때는 중국에 가면 리펑 총리가 조어대로 초대해서 한 시간씩 베이징올림픽의 당위성을 토의하곤 했다. 중국의 대회 운영 실적이 없었기에 이를 보충하기 우해 1993년에는 동아시안게임을 창설하여 상하이에서 치렀다. 당시 허전량이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이때는 장쩌민 주석이 직접 상하이까지 와서 필자와 면담을 했다. 또 1996년에는 하얼빈에서 동계아시안게임도 개최했다. 이때도 장쩌민 주석이 와서 자리를 나란히 하고 필자와 시간을 보냈다. 2001년에는 베이징에서 올림픽 수준의 유니버시아드게임도 열었다. 허전량은 이 모든 것을 ‘아시아를 위해’라는 모토로 훌륭히 치러냈다. 중국은 2000년 올림픽유치가 실패에 돌아가자 8년을 조용히 준비했다.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우리가 배워야할 대목이다. 떠드는 것,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보다 결과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1997년 평양이 유치했던 제2회 동아시안게임을 부산에서 치렀다. 부산과 경합했던 대만의 문교장관에게 귀빈 ID를 발급한 것을 알고 중국은 새벽 3시에 강경 항의를 해왔다. 당장 무슨 일이라도 낼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때 수습안은 대만장관의 VIP카드는 취소하고 일반카드를 내주는 대신 대우는 같은 급으로 한다는 것으로 결정됐다. 당시 “김 위원장(필자)의 얼굴을 보아 그 정도로 한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허전량이었다.
2001년 모스크바 IOC총회에서 필자가 IOC위원장에 출마해 로게와 격돌했을 때 허전량은 ‘북경올림픽도, IOC위원장도 아시아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허전량 얼굴이 찌그러지고 필자와 말하기가 힘들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나중에 보니, 즉 그 당시 중국체육장관이었던 위안웨이민은 2009년에 낸 회고록(‘베이징올림픽 개최권, 비리로 따냈다’가 주 내용)에 ‘당시 중국정부가 밀약을 해 중국인 IOC위원 3명에게 로게 지지를 지시했는데 허전량은 여전히 필자를 지지하고 다녀 질책을 했다’고 나왔다. 허전량은 그런 사람이다. 위안웨이민의 회고록이 나와서 로게가 무척 기분이 나빴다 한다.
중국은 1993년에 2표 차이로 시드니에 지고도 아무 말 없이 준비하고 98년에 자칭린, 우샤오주, 허전량이 나서서 2008년 올림픽 개최를 신청하여 2001년 모스크바 총회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동안 우리처럼 “3수가 어떻고”, “한 나라에 두 개의 선물은 안 준다”, “대륙별 순환이 어떻고” 등의 말을 만들지 않았고, 실속 있는 준비와 명분 쌓기, 우방세력 만들기에 전념해 모스크바에서 오사카, 토론토, 파리, 이스탄불을 큰 차이로 따돌린 것이다. 그때는 이미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가진 중국에서 올림픽을 여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여론이 확산돼 있었다.
2008년은 즉 중국의 백년 꿈이 이룩된 해다. 중국은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을 내걸었고, 조직위원장은 류치였지만 실제는 당의 시진핑 부주석이 책임졌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는 80명 이상의 외국 국가원수가 참석했다. 이때 중국은 ‘중국의 대개조’,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을 내걸고 중국의, 중국에 의한, 중국을 위한 올림픽을 치렀다. 204개국에서 1만 6000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했고 중국은 51개의 금메달을 따며 36개의 미국, 23개의 러시아를 따돌리고 스포츠에서도 세계 최강을 자랑하게 되었다.
허전량은 속이 꽉 찬 실력 있는 사람이다. 중국을 위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를 생각하는 중국신사다. 중국 체육의 오늘날이 있기까지에는 허전량이 있었다. 허전량은 약했던 중국의 IOC 내 기반을 막강하게 만든 사람이다. 실제로 사마란치는 그를 IOC 문화교육위원장으로 앉히며 중용했다. 그런 까닭에 IOC박물관에는 중국 고품이 많다.
마오쩌둥의 불어 통역을 하고, 중국에서 체육 국제화의 대명사였던 허전량도 자기 임무를 다하고 필드를 떠났다. 그러나 그의 공적과 미소 가득한 둥근 얼굴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필자 이름 석 자를 한자로 써보라고 한 후 이를 보고는 ‘금과 구름과 용이 어울린다’고 짐짓 놀란 표정을 짓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