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김윤배 청주대 총장, 필자, 김준철 청주대 명예총장. |
최근 OECD 발표에 우리나라 어린이의 독해력 등이 세계 2위라는 기쁜 소식이 있었고 일본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다. 일제 강점기에도 어머니, 아버지가 물장사를 하든 논밭을 팔아서든 자녀들의 교육을 최우선으로 했다. 이러한 교육열이 지금의 한국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교육계의 위대한 인물 두 명을 추가로 소개하려 한다. 바로 청주대학교의 김준철과 명지대학교의 유상근이다.
▲김준철 청주대 명예총장
한국의 대학은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편이다. 하지만 지방에도 훌륭한 대학이 많다. 그중 청주대학교는 으뜸으로 꼽을 만하다. 청주대학교는 석우(石牛) 김준철의 선대가 설립한 학교다. 김준철은 1923년 청주에서 태어나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학구파인 그는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과 건국대학교 경영학 박사과정도 이수했다. 미국 국제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김준철은 선대인 청암(淸巖) 김원근, 석정(錫定) 김연근의 유지를 받들어 7개의 대학, 고등학교, 초급학교를 육성한 외골수 충청도 양반이다. 청주대는 지방대학이지만 오늘날 한국 유수의 종합대학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의 좌우명은 진실과 용기다. 진실은 생명이 추구하는 최고선(最高善)의 빛이고 용기는 추진력이다. 이 좌우명은 그의 가훈이기도 하다. 집안 전체가 진실과 용기를 생활지표로 삼고 있다. 진실은 참이고, 용기는 힘이라고 믿고 이 두 낱말을 묶어 생활철학의 거점으로 삼고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그의 소박한 철학이 이제 미수(米壽)를 지낸 나이에 그윽한 뜻을 더해주고 은은한 진리의 빛을 더해주는 듯하다.
김준철은 선대의 유지를 따라 26세에 육영에 뛰어들어 1924년에 선대들이 시작한 대성보통학교를 대성초등학교와 대성중학교, 대성여중, 대성여상, 대성고등학교, 청석고등학교 그리고 청주대학교로 이어오고 있다. 청주대학교는 6·25 한국전쟁과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세계적인 국제대학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충청북도를 넘어 한국 유수의 대학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석우 김준철은 전통을 존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의 흐름을 타고 현대화에 앞장섰다. 중간 중간 다른 길로 빠질 수 있는 유혹이 있었지만 동하지 않았다.
6·25 전쟁 시절 청주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있다. 필자가 전쟁 초기 6사단에 배속되어 충청도와 강원도를 일진일퇴할 때 어린 청주여고생들이 나라를 구하겠다며 자원 입대한 것이다. 그녀들은 우리와 함께 국토방위전선에서 생사를 함께했다. 청주는 교육열만큼 애국심도 큰 곳이다.
청주에 가서 김준철의 사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선친이 물려준 오래된 구옥을 지금까지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 놀라운 집념이다. 현대식의 편리한 집으로 바꾸거나 옮길 수도 있을 터인데도 말이다. 석우는 효심이 지극하여 선대 두 분을 대학 뒷산에 모시고 있다. 필자도 묘소를 함께 참배한 적이 있다.
석우는 국제교류의 물결 속에서 장학사업과 대한체육회, 충북체육회, 국기 태권도 발전에도 큰 공헌을 했다. 한때 의과대학 설립을 추진하다가 정치적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원칙대로 일을 해야지 왜 변칙으로 가느냐며 올곧은 추진방식을 택했는데 그것이 정권의 미움을 샀던 것이다. 크게 보면 이러한 강직함이 오늘날 청주대학교의 발전과 성공에 밑거름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김준철은 성품이 답답하게 느낄 정도로 겉으로는 움직임이 없다. 그러나 속은 다르다. 참을성과 지혜와 덕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결과로 나온다.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가진 충청도 양반이다. 한번은 자신이 임명한 김명회 총장이 몇몇 후배 교수들의 선동에 놀아나 재단 배척에 앞장 선 일이 있다. 김준철은 이를 용서 없이 처리했다. 은혜를 모르고 교육자답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음에는 자기 모교인 연세대 출신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청주대 출신들이 학교를 훌륭하게 이끌고 있다. 인재가 많이 나온 것이다.
김준철은 필자가 대한체육회 일을 보면서 만났다. 김준철은 충북을 대표하는 대한체육회 이사였다. 그는 다방면에서 활동을 했다. 대한체육회 이사, KOC위원,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 한중교육장학재단 이사장, 피플 투 피플(People to People) 한국총본부 총재, 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 청주대 총장, 학원장, 명예총장을 두루 거치면서 오늘날의 청주대를 있게 했다.
이제는 석우의 뜻을 이어 장남 김윤배 박사가 청주대 총장으로 학교 운영에 전념하고 있다. 얼마 전 ‘일류국가로 가는 길과 스포츠외교’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러 갔을 때 석우와 김윤배 총장의 안내를 받고 학교를 둘러보곤 놀랐다.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발전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중국 유학생을 위한 기숙사도 있었다. 상상 이상이었다. 석우답게 조용히 움직이다가 그가 말한 용기대로 발군의 추진력으로 이룬 성과이다. 어느새 이화여대, 연세대에 이어 가장 튼튼한 재단이 되어 있었다. 대학의 평가는 가르침의 질, 학생의 생활의 질, 졸업생의 사회공헌이 나타나는 전통으로 이루어진다.
석우 김준철을 이어 김윤배 청주대 총장은 일류 세계대학을 꿈꾸며 세계 어디에서 경쟁을 해도 이길 수 있는 한국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키우는 데 여념이 없다. 21세기 네트워크 시대, 무한경쟁시대에 지식을 통합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청주대가 지향하는 인재상이다.
김준철의 차녀 김민선도 뉴욕주립대학교의 연합체인 롱아일랜드 음악대학(Long Island Conservatory, SUNY)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젊은 여자가 훌륭한 4년제 대학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석우 집안 사람에게는 특별한 교육 유전자가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석우가 미수(米壽)연을 열어 청주까지 갔다. 그의 공헌에 대한 존경심에 열일 제쳐두고 간 것이다. 가서 보고 다시 놀랐다. 검소한 모임이지만 그의 평생사업에 대한 축하와 경의로 가득 찬 모임이었다. 충청북도 대부분의 유지와 교육계 수장들, 청주대를 나온 인재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심으로 석우를 축하했다.
‘진실과 용기의 사나이’ 석우 김준철은 일찍이 교육 분야에서 외골수로 우리나라가 필요로 하는 인재 육성에 평생을 바친 충청도 양반 그리고 거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 유상근 명지학원 설립자 가족사진. |
▲유상근 명지학원 설립자
두 번째는 명지대학교와 그 설립자인 방목 유상근(兪尙根)이다. 방목도 한국의 민주화 및 경제발전과정에서 인재육성에 평생을 바친 대표적인 교육자다. 그는 1922년 충남 부여 출신으로 아버지 원준(元濬)과 어머니 윤원자(尹原子)의 6남매 중 맏아들이다. 백제의 고도 부여 출신이라 그런지 풍기는 인상이 좀 독특하다.
6·25 전쟁이 끝나던 1953년에 국민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관계에 들어가 충청북도 산업국장, 내무부 통계국장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통계제도 선진화에도 기여했다. 학구파인 유상근은 이어서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1969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미국의 피츠버그대학에서도 행정학을 연구했고, 로스앤젤레스의 성서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33세에 효동교회 장로가 된 유상근은 복음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의 둘째 아들이 자기 운전기사가 주차를 하다가 치어 죽게 되었는데도 평생 운전기사로 데리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1991년 강경대 명지대생이 데모하다가 죽었는데 자기 아들이 죽은 것 같다고 한 것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의 인품과 기독교 사랑을 보이는 대목이다.
나중에는 김종필 내각에서 통일원 차관을 거쳐 통일원 장관을 지냈고, 통일문제에도 공헌했다. 참고로 그때는 통일문제에 대한 사정과 현실성이 지금과 달라 “통일원 예산이 큰 면(面) 정도”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방목과의 첫 인연은 1963년 8월로 기억된다. 필자가 내각수반실에 있다가 주미대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하게 됐다. 보병 6사단 작전처 시절의 전우 신성재가 남대문의 고려여행사에 근무하고 있어 그의 권유를 받아 나와 나의 가족 4명이 워싱턴까지 가는 항공권 4매를 샀는데 1인당 574달러였다. 이 고려여행사가 바로 유상근 박사가 경영하는 여행사였고, 그때 만나게 됐다. 그때는 국제여행이 특수신분 아니면 안 될 때라 각 여행사가 표를 한 장이라도 더 팔려고 노력할 때였다. 표를 사면 노스웨스트의 가방 같은 선물을 푸짐하게 주었다.
그 후 필자가 청와대에 근무할 때 유상근 총장과 저녁을 하게 됐다. 필자가 워싱턴 근무 시절 인연을 맺은 ‘피플 투 피플(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설립)’의 한국총재를 유상근 총장이 맡게 되어서 여러가지 상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장소는 세운상가 안에 있는 식당이었다. 그 후 유상근은 박경원 강원도지사, 김연준, 김준철 등과 PTP를 교대로 끌고 갔다. 이 프로그램은 지금도 잘 이어지고 있다. 그 후 유상근 총장은 김종필 내각의 통일원 차관, 장관으로 필자와 종종 만남을 가졌다.
유상근의 장남 유영구는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를 맡고 있다. 유상근의 차남 유병진 총장은 명지대 부총장, 관동대 총장 시절에도 KOC의 대학스포츠위원회(KUSB) 명예총무, 부위원장을 맡아 필자와도 같이 1995년 후쿠오카유니버시아드에 부단장으로 가기도 했다.
유병진 총장은 금년부터 김종량 한양대학교 총장의 뒤를 이어 대한대학스포츠위원회(KUSB) 위원장에 취임, 더욱더 대학스포츠의 발전과 국제화에 힘쓰고 있다.
유상근은 온화하고 듬직하고 꾸밈이 없는 충청도 양반의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정신(믿음, 사랑, 봉사)을 몸소 실천한다. 또 글로벌시대에 맞춰 세계로 눈을 돌렸고, 대학운영과 인재육성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관심을 갖고 남을 도와주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한다. 화려하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시대의 영웅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사회발전에는 이처럼 ‘작은 거인’의 힘이 더욱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