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폰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그녀의 아버지였던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가장 미국적이며 위대한 배우로 손꼽히고 있는 헨리 폰다는 제인 폰다에게 많은 것을 주었고 많은 것을 앗아갔다. 제인 폰다가 지닌 배우의 재능과 독특한 외모는 모두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은 그녀를 단순한 배우가 아닌 미국 사회의 뜨거운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1937년 12월 21일에 뉴욕에서 태어난 제인 폰다의 유년기는 ‘헨리 폰다의 딸’이라는 억압 속에 있었다. 그녀의 틴에이저 시절은 암울했다. 어머니 프랜시스는 헨리 폰다가 바람이 나자 자살했던 것. 제인 폰다는 12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제인은 스무 살이 넘어서야 잡지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은 긴 세월 동안 그녀의 삶을 지배한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권위에 대한 저항은 대학 시절부터 드러났다. 그녀는 보수적인 여대에 다녔는데, 그곳은 매일 티 타임에 흰 장갑과 진주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교칙이 있었다. 여기에 대항했던 제인은 나체에 흰 장갑과 진주 액세서리만 한 채 티 타임 장소에 등장했다. 하지만 이런 당당함 뒤엔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다. 심리적 압박에 의해 그녀는 13세 때부터 37세까지 ‘식욕 이상 항진증’, 즉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증세에 시달렸다. 모델 시절엔 음식을 거부한 채 담배, 커피, 각성제 그리고 딸기 요거트로만 살기도 했다.
1960년에 배우로 데뷔한 그녀는 아버지의 후광 속에서 자연스레 톱 배우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만, 대서양을 건너 파리로 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로저 바딤을 만나 결혼했다. 브리지트 바르도의 전 남편인 바딤은 폰다와의 만남이 세 번째 결혼이었는데, 그는 폰다를 영화 속에서 백치미 흐르는 섹스 심벌로 만들었다. 그 정점은 <바바렐라>(1968). 폰다의 육체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면서 최대한 노출하는, 전형적인 관음증 영화였다.
바딤과의 결혼 생활은 쉽지 않았다. 에로티시즘에 젖어 있었던 바딤은, 창녀를 침실로 끌어들여 제인 폰다에게 트리플 섹스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 자아를 지닌 여성이었고, 어느새 반전 시위의 선두에 서 있었다. 1972년엔 전쟁 중인 하노이를 방문해 공개적으로 북베트남을 지지해 ‘하노이 제인’이라는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1973년엔 진보 정치인인 톰 헤이든과 결혼했다.
톰 헤이든과 이혼하고 1991년에 미디어 거물인 테드 터너와 결혼하면서(2001년 이혼) 다시 한 번 세간의 관심을 모은 제인 폰다는, 50대 이후 페미니즘과 환경운동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일하다 보면, 여배우들은 일종의 매춘 기술 같은 걸 익히게 된다”고 말했던 제인폰다. 초기엔 창녀 캐릭터나 블론드 백치미로 주목받았지만 <인형의 집>(1973)의 노라나 <나인 투 파이브>(1980)의 독립심 강한 여성 등으로 변모해갔다.
2009년엔 72세의 나이로 <33개의 변주곡 33 Variations>라는 연극 무대에 서 토니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한때 테레사 수녀, 영국의 대처 수상, 낸시 레이건과 함께 ‘시대의 여성’이었던 그녀는, 육체적으로 착취당하기 십상인 여배우의 굴레를 벗고 에어로빅과 여성 운동 등을 통해 여성 육체의 강인함을 내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건강미를 잃지 않고 있는 이 배우는, 2011년에 새 영화가 나오는 ‘현역’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