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순위 캐스팅은 없다?
놀랍게도 <아저씨>의 캐스팅 우선순위는 배우 송강호와 김윤석이었다. 메가폰을 잡은 이정범 감독은 실제로 40대 아저씨가 이웃집 소녀를 구하는 모습을 구상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읽은 원빈이 출연을 자청하면서 새로운 판을 짰다. 이정범 감독은 “원빈이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원빈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에게 걸맞은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수정했다”고 밝혔다.
<아저씨>의 또 다른 유력한 캐스팅 후보는 김명민이었다. 제작사는 김명민을 간절히 원했지만 <아저씨>와 <파괴된 사나이>를 두고 고민하던 김명민은 결국 <파괴된 사나이>를 선택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작사는 ‘닭 대신 꿩’을 잡은 셈이다. <아저씨>의 관계자는 “<내 사랑 내 곁에>로 숱한 남우주연상을 받은 김명민에게 가지 않은 시나리오가 없었을 정도였다. <아저씨>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결국 원빈에게 안겨졌다”고 말했다.
‘연기의 교과서’로 불리는 김명민도 1순위가 아닌 시절이 있었다. <내 사랑 내 곁에>는 당초 권상우가 출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출연을 번복하면서 <내 사랑 내 곁에> 시나리오는 김명민을 만나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됐다. 그의 출세작인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하얀거탑> 역시 각각 송일국과 차승원이 먼저 물망에 올랐었다. 한 영화 제작사 대표는 “당대에 가장 ‘잘나가는’ 배우에게 시나리오가 몰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출연한다는 보장은 없다. 때문에 ‘1순위 후보’는 큰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 대타 홈런은 누구?
전역과 동시에 영화 <그랑프리>(감독 양윤호)의 촬영에 돌입한 배우 양동근. 이미 촬영을 시작했던 이준기가 갑작스럽게 군 입대로 인해 공백을 메우게 됐다. 누가 봐도 명백한 ‘대타 캐스팅’이었다. 이 부담스러운 자리를 양동근이 흔쾌히 맡은 것은 양윤호 감독과의 인연 때문이다. 당시 양동근은 “내 의지가 아니라 감독님의 선택으로 출연하게 됐다”고 밝혔다.
양동근과 양윤호 감독은 2004년 영화 <바람의 파이터>로 의기투합해 흥행 가도를 달린 바 있다. 하지만 <바람의 파이터>의 원래 주연배우는 비였다. 당시 비는 촬영을 시작했다가 중도 하차했고 그 자리를 양동근이 꿰찼다. 한 영화 관계자는 “양동근이 <바람의 파이터>에 이어 연타석 ‘대타 홈런’을 쳐주길 바랐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며 “양윤호 감독은 기꺼이 출연해 준 양동근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꼈다”고 전했다.
지난해 말 개봉된 영화 <헬로우 고스트>(감독 김영탁)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차태현. 한때 ‘로맨틱 코미디의 왕’으로 불렸던 차태현은 <엽기적인 그녀> 이후 줄곧 내리막을 탔다. 그를 수렁에서 건진 작품은 2008년 말 개봉된 <과속 스캔들>이다. 이 영화는 임창정이 고사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차태현은 전국 관객 800만 명을 모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다시 충무로의 주력 배우가 된 차태현은 비슷한 장르의 <헬로우 고스트>를 선택해 존재감을 과시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에 나선 차태현은 “사실 <과속 스캔들>의 인기는 나를 중심으로 한 게 아니었다. (박)보영이에게 초점이 맞춰졌는데 500만이 넘으니까 ‘재미있게 봤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 느낌은 참 오랜만이었다”고 말했다. 정상과 바닥을 모두 경험해 본 스타가 가진 여유와 겸손함이라 할 수 있다.
# 멀고도 험한 캐스팅
적게는 30억 원에서 많게는 10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되는 상업 영화. 성공 확률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제작자와 감독들은 인기 좋고 연기력 출중한 배우를 원한다. 하지만 ‘흥행보증수표’로 불리는 배우들은 손에 꼽는다. 때문에 배우들의 몸값은 오르고 캐스팅은 ‘전쟁’일 수밖에 없다.
감독과 제작자가 배우들을 섭외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삼고초려다. 한 감독은 “수차례 배우들을 만나 설득하다 보면 어느 순간 넘어온다”고 귀띔했다. 물론 탄탄한 시나리오와 재정적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시나리오 보는 안목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한석규. <백야행>과 <이층집 악당>에 캐스팅하기 위해 감독들은 한석규의 집을 수차례 두드렸다. <백야행>의 박신우 감독은 급기야 한석규에게 편지를 썼다. 한석규는 “감독이 쓴 장문의 편지를 읽고 출연을 결정하게 됐다. 내게 캐스팅 제안을 할 때부터, 그리고 <백야행>을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연출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국민 엄마’ 김혜자를 <마더>에 출연시키기 위해 ‘거장’ 봉준호 감독은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과거 봉준호 감독의 홍대 작업실에서는 김혜자의 집이 내려다 보였다. 그 때부터 김혜자를 흠모한 봉 감독은 “김혜자가 있었기 때문에 만들 수 있던 영화였다. 김혜자가 출연을 고사할 경우 <마더>를 만들지 않으려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배우들이 직접 캐스팅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윤제균 감독과 함께 <해운대>를 ‘1000만 영화’로 만든 설경구. “윤제균 감독과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같이 울고 있더라. 그 다음날 출연하기로 했다”고 말한 설경구는 윤 감독이 <하모니>를 제작하자 김윤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선 “시나리오가 좋으니까 출연을 고민해 봐라”고 설득했다는 후문이다.
박해일은 2009년 영화 <10억>에 출연하며 신민아와 박희순을 직접 캐스팅했다. 두 사람과 친분이 두터운 박해일은 헐값(?)에 두 사람을 출연시키며 제작진의 찬사를 받았다는 후문. 또 다른 영화 관계자는 “아무리 바쁘고 콧대 높은 배우도 지인의 부탁은 거절하기 힘든 법이다. 상업 논리가 통하는 충무로에도 인정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