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1일 국방부에서 이상호 합참군사지원본부장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삼호주얼리호에 대한 구출작전(작전명 ‘아덴만 여명작전’)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
300분 동안 007작전을 방불케했던 ‘아덴만 여명작전’의 순간 순간을 재조명했다.
▲ 진압작전을 위해 고속단정과 링스헬기가 여명에 맞춰 삼호주얼리호에 다가가고 있다.사진제공=해군 |
작전과 관련해 이성호 합참 군사지원본부장은 21일 언론브리핑을 통해 “링스헬기가 출동하고 고속단정 3척이 기동해서 기습적으로 선박을 장악했다. 작전은 총 6단계로 진행됐다”며 “1단계로 신속한 기동과 해적을 위협하는 사격을 통해 해적의 주위를 분산시켰으며 은밀한 작전으로 해적이 알지 못하도록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작전 개시와 함께 해적들의 시선을 분산하기 위해 최영함(4500t급)의 5인치 함포가 먼저 불을 뿜었다. 여러 발의 함포 소리에 놀란 해적들은 잠에서 깬 채 우왕좌왕했고, 이 틈을 노리고 링스헬기가 출동했다. 링스헬기 또한 해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K-6 기관총 수백발을 선교 등으로 발사했다. UDT 작전팀의 안전한 승선을 위해 선교에 있던 해적들을 선실내로 몰아넣기 위해서였다.
▲ 고속단정이 삼호주얼리호 선미에 접근해 UDT 작전팀이 신속하게 선내로 진입하고 있다.사진제공=해군 |
해적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AK소총과 기관총, RPG-7(휴대용 로켓)으로 무장한 해적들은 저항하다가 사살되거나 투항해 생포됐다. 작전 끝 무렵에는 해적 4명이 AK소총을 발사하며 끝까지 저항해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해적 2명은 죽고 2명은 생포됐다.
작전 종료 결과 해적 13명 중 8명은 사살되고 5명이 생포된 반면 우리 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부상당한 선장 석 아무개 씨를 제외한 선원 20명도 안전하게 구출됐다.
▲ UDT 작전팀이 해적을 진압하고 선교에 선원들을 대피시키고 있다. 선박 외벽의 총탄 흔적과 깨진 유리창이 위험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사진제공=해군 |
작전 소요 시간과 관련해 이성호 본부장은 “삼호주얼리호는 1만 1000t급 화학운반선으로 격실이 57개가 있어 한 곳씩 검색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며 “해적을 공멸하고 선원들의 안전을 확보한 것은 대략 3시간 만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구출작전은 선원 전원이 구출되고 우리 군 장병들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성공한 작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원 1명이 총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 합참의 한 관계자는 “대한민국 선박을 대상으로 한 해적의 불법적인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며 “작전과정에서 정부 유관부처와 군, 연합해군사(CMF), 선사, 언론사 등 민관군이 선원의 안전한 구출을 위해 상호 긴밀히 협력한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사례”라고 말했다.
합참은 특히 정보가 제한되고 해적과 인질이 혼재된 어려운 상황에서 치밀한 사전계획과 연습으로 피해를 최소화한 가운데 작전을 성공함으로써 한국군의 우수한 작전수행능력을 인정받는 성과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 UDT 작전팀에 구출된 선원들이 외부갑판으로 나와 안도하고 있다.사진제공=해군 |
하지만 1월 20일 지방의 한 유력일간지가 ‘청해부대가 선원 구출에 나섰다가 3명이 다쳤다’는 내용을 보도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1차 작전 실패가 대대적으로 보도될 경우 국내에서 찬반논쟁이 일고 해적들을 자극해 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즉각 해당 언론사에 상황을 설명하고 인터넷 삭제 등을 요청했고, 해당 언론사는 “기자단에 등록되지 않아 엠바고를 정확히 몰랐다”면서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와 관련 이성호 본부장은 언론 브리핑 과정에서 작년 4월 삼호드림호 피랍 때는 작전을 못했는데 이번에 작전을 감행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때는 너무 빨리 언론에 노출된 관계로 군이 정상적인 작전을 하는 데 많은 지장이 있었다”며 언론의 엠바고 유지가 작전 성공에 이바지했음을 분명히 했다.
▲ 해적들을 완전히 진압한 UDT 작전팀이 생포한 해적들을 무릎 꿇리고 감시하고 있다. 사진제공=해군 |
청와대는 삼호주얼리호의 피랍 소식을 접한 뒤 사태 해결에 만전을 기하면서도 군사작전을 은밀히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도 피랍 이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을 수차례 찾아 현황을 보고 받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작전은 과거 소극적이었던 피랍 사건 해결 방식에서 벗어난 첫 군사작전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효과를 더욱 극대화할 것이라는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해적들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국제적인 공조에 보조를 맞췄다는 점에서 한국군의 위상 제고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
프랑스 선박은 ‘노터치’
다른 국가들 역시 아라비아해 인근 지역에서 출몰하는 소말리아 해적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때문에 많은 국가들이 이 지역을 통과하는 자국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군함을 보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해외에도 피랍된 자국 선박을 구출하기 위한 사례가 있다.
피랍 선박 구출활동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는 단연 프랑스다. 이 지역 해적들에게 프랑스 해군은 보기만 해도 오싹한 무서운 존재로 통한다. 프랑스는 지난 2008년 4월 자국의 초호화 유람선이 해적에 피랍되었을 때 구출작전을 개시, 인질 2명을 성공적으로 구출한 바 있다. 당시 프랑스 해군은 해적 1명을 사살하고 6명을 체포했다. 또한 이듬해 3월에는 역시 해적에 의해 피랍된 요트를 급습해 해적 2명을 사살하고 인질 4명을 구했다. 작전 당시 인질 1명이 희생되었지만 사르코지 정권의 강력한 대테러 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하는 기회로 작용했었다.
러시아 역시 피랍 선박 구출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국가다. 작년 5월 러시아는 헬리콥터를 이용한 구출작전을 개시해, 5200만 달러 상당의 기름을 싣고 가던 자국의 유조선을 구출한 바 있다. 당시 러시아 해군은 11명의 해적들을 제압하고 23명의 선원들을 구해냈다.
세계 최고의 군사강국 미국도 피랍된 자국 선박을 구한 바 있다. 지난 2009년 4월 미국은 화물선 머스크 앨라배마호가 해적들에 의해 피랍되자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해적 사살 권한을 해군에 부여하며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작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특수전요원(SEAL)이 직접 투입되었으며 피랍 5일 만에 해적 3명을 사살하고 선장을 구출해 화제가 되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금미305호’ 그들 아직도…
이번 ‘삼호주얼리호’ 선원들 탈출 사건을 계기로 역대 선박 피랍사태들을 되짚어 봤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것은 지난해 10월 9일 한국인 2명을 포함해 선원 43명이 탑승한 241t급 통발어선 금미305호가 케냐 앞바다에서 해적에 피랍된 사건이다. 피랍 105일째를 지나고 있지만 석방 협상은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지난해 4월 4일에도 삼호해운사가 수난을 겪었다. 삼호 드림호가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된 것이다. 이 사건은 역대 피랍사건 중 최장기인 ‘217일 만에 석방’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소말리아 해적은 선원 한 명당 900달러의 몸값을 요구해 정부 측에서 나서 합의금을 건네주고 난 후에야 겨우 마무리될 수 있었다.
2008년 11월 15일에는 한국인 5명이 승선한 일본 선적 화물선 ‘켐스타비너스호’가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됐다. 당시 화물선에는 한국인 5명이 타고 있어 화제가 됐다. 결국 선원들은 88일 동안의 협상 끝에 전원 석방됐다.
2008년 9월 10일에는 소말리아 인근 아덴만 해상에서 한국인 선원 8명이 탑승한 선박 ‘브라이트루비호’가 피랍됐다. 당시 선원들은 피랍 37일 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2007년 10월 28일에는 한국인 2명 탑승한 일본선적 ‘골든노리호’가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무장단체에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1명은 당일 바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1명은 피랍 45일 만인 12월 12일 석방됐다.
2007년 5월 15일에는 한국인 4명이 탑승한 원양어선 ‘마부노 1, 2호’가 소말리아 근해에서 무장단체에 피랍됐다 173일 만인 11월 4일 석방됐다.
2006년 4월 4일에는 동원수산 수속 원양어선 ‘제628호 동원호’가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조업 중 현지 무장단체에 피랍됐다. 한국인 8명을 포함한 선원 25명은 피랍 117일 만인 7월 30일 석방됐다.
이렇듯 매년 한국인 선박 피랍사태가 이어지는 데다 사건 경위 및 피해양상도 유사하지만 막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제사회 원칙상 해적과 테러단체에게는 정부차원의 금전적 협상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원 피랍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한국의 경우 국제사회의 이목을 신경 쓰면서 선원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을 만한 제도적 장치가 없는 이상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뱃길 운항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