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부서지는 해변가. 제임스 본드는 바닷가를 보고 있다. 이때 한 여인이 손에 큰 조개를 들고 바다 속에서 걸어 나온다. 허리에 칼을 차고 있는 그녀는 본드에게 말한다. “당신도 조개를 찾고 있나요?” 본드는 대답한다. “아뇨. 그냥 당신을 보는 거요.” 2003년에 영국의 ‘채널 4’에서 “영화사상 가장 섹시한 순간” 설문 조사에서 당당히 1위에 꼽힌 이 장면은 우르술라 안드레스라는 이름과 함께 ‘본드걸’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렸다.
이때 만난 사람이 바로 존 데릭. 보 데릭의 남편으로도 유명한 그는 안드레스에게 반했고 스물한 살의 신부와 서른한 살의 신랑은 1957년 라스베이거스의 허름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하지만 이후 안드레스가 프랑스 배우 장 폴 벨몽도와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1966년에 그들은 이혼한다).
결혼 후 한동안 활동을 쉬던 안드레스는 유럽으로 돌아와 기회를 잡는다. 첫 번째 007 시리즈였던 <007 살인번호>(1962)에 허니 라이더 역으로 출연하게 된 것. 38-22-35의 사이즈가 말해주듯 그녀의 글래머러스한 매력 앞에 수많은 관객들은 환호했고 이후 007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엔, 제임스 본드 역의 숀 코너리만큼이나 ‘본드걸 안드레스’의 공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본드걸의 스탠더드를 제시했고 이후 등장한 모든 본드걸은 그녀와 비교되어 평가받아야 하는 잔인한 운명에 처했다. 그녀가 입었던 하얀 비키니는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의상이 되었다(이 옷은 2001년 어느 경매에서 3억 5000만 파운드(약 6200만 원)에 팔렸다).
안드레스의 관능미는 나이와 상관없었다. 40세가 다 되어 출연한 이탈리아 코미디 <간호사>(1975)에서 그녀는 나이 많은 백만장자를 성적으로 자극해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가는 간호사 역을 맡았는데 이 영화의 카피는 “우르술라는 당신의 온도계를 녹여 버릴 것이다!”였다.
안드레스가 더욱 유명해진 건 수많은 스타와의 로맨스와 스캔들 때문이었다. 그녀는 1대 제임스 본드인 숀 코너리를 비롯해 딘 마틴,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장 폴 벨몽도 등 함께 연기한 배우들과 종종 실제 연인으로 이어졌다.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피터 오툴, 워런 비티, 라이언 오닐, 데니스 호퍼 등의 스타들이 모두 그녀의 ‘한때 연인’이었고, 유명한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미국의 자동차 업계 거물인 존 드로리안, 패션 디자이너인 올렉 카시니 등도 안드레스와 로맨스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프로디테 역을 맡았던 <타이탄 족의 멸망>(1981)에서 만난 15세 연하의 배우 해리 햄린과의 사이에서 44세의 나이에 아들 디미트리를 낳았다(그들은 1982년에 헤어졌다). 아이가 태어나자 안드레스는 영화계에서 물러나 유럽에서 TV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2005년에 은퇴해 말년을 보내고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