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24일 서울 서남부지역 연쇄 강도강간 사건 피의자 김 아무개 씨(왼쪽)가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김 씨는 혼자 사는 여성들을 골라 일주일가량 일상 생활을 지켜보며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했다. 연합뉴스 |
스카치테이프와 식칼. 이 두 가지 물건만으로 김 씨는 영등포구 일대를 돌아다니며 2년 동안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질렀다. 가스배관을 타고 올라간 후 열려진 창문으로 드나든 것도 김 씨 범죄의 특징 중 하나. 김 씨는 방으로 들어간 후 여성들의 목에 식칼을 들이대고 협박해 지난 2008년 9월경부터 8명 이상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욕을 채워왔다.
그러나 피해여성들은 김 씨의 인상착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김 씨는 피해여성의 눈을 이불과 옷으로 가리거나, 자신의 얼굴을 여성 속옷으로 가린 채 성폭행했기 때문이다. 피해여성들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사투리를 쓴다는 것과 그의 목소리 정도였다. 때문에 경찰은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했고, 수사에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김 씨는 밤거리를 활개치고 다녔고 피해 여성들은 늘어났다. 결국 경찰은 사건 현장에 남아 있는 용의자의 DNA 정보를 축적한 후 성폭행 전과가 있고, 사투리를 쓰는 인근 주민 3100명의 DNA를 감식하기도 했다.
2010년 10월 10일, 종횡무진했던 김 씨는 결국 수사기관에 덜미를 잡혔다. 절도 신고를 받고 즉각 출동한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바로 체포된 것이다. 김 씨가 체포될 당시 사건 현장에는 손과 발을 스카치테이프로 결박당한 여성이 방구석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방 창문은 열려 있었고 김 씨가 드나든 운동화 자국이 남아 있었다. 경찰은 그가 그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신길동 발바리 사건의 용의자라 직감하고 경찰서로 연행했다.
그러나 단순한 의혹만으로 그가 이전 사건의 피의자라 단정할 순 없었다. 김 씨 역시 이 점을 간파하고 증거를 대보라고 으름장을 놨다. 검찰 조사에서도 그의 이전 범죄행각에 대한 증거를 밝혀내지 못해 그는 절도 혐의로만 구속된 후 집행유예 10개월을 선고받고 다시 어두운 밤거리로 나왔다. 물증이 없을지라도 심증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에 경찰은 그의 구강상피세포를 수집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관해뒀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확보한 김 씨의 DNA는 3개월 후 그가 저지른 범죄의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했다. 그동안 영등포, 구로, 경기 부천 일대 성폭행 현장에서 수집했던 용의자의 DNA가 김 씨의 것과 일치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뻔뻔스런 그의 연기도 현장에 남아 있던 DNA까지 둔갑시킬 순 없었던 셈이다. 결국 경찰은 휴대폰 위치추적과 잠복수사로 지난 1월 22일 강서구 화곡동 소재 고시원에 살고 있던 김 씨를 검거했다.
그러나 모든 범죄행각이 밝혀진 후에도 김 씨는 여전히 태연했다. 경찰조사에서 “그냥 절도만 하려고 들어간 것인데 마침 여자 혼자 있길래 우발적으로 저지른 행위다. 고의성이나 계획적인 범죄는 아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를 수사한 용산경찰서 형사3팀 관계자는 “반성은커녕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충동적으로 한 번쯤 할 수 있는 실수가 아니냐는 투로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씨의 진술과 달리 피해여성들의 기억 속에는 그의 범죄 행각은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김 씨는 우선 ‘혼자 사는 여성’들 중 성욕을 해소할 ‘희생양’을 찾기 위해 저녁 시간 어두운 골목길에서 범행대상을 물색했다. 사냥감이 보여도 범죄를 서두르지 않았다. 혼자 길을 걷는 여성이 보이면 일주일 정도 관찰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나 여성이 집에 들어갔을 때 불이 켜지는 방을 살피고, 혼자 사는지 누가 드나들지는 않는지 등을 세밀하게 살폈다.
적합한 대상이 정해지면 창문이 열리는 순간만 기다렸다. 적당한 타이밍이 오면 집으로 들어간 후 소지하고 있던 식칼을 꺼내 목에 들이대고 “눈을 뜨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 후 스카치테이프로 양손과 발목을 결박하고 집 안에 있는 현금과 고가의 물품 등을 챙기기 시작했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챙겼다 싶으면 피해여성들의 눈을 가리거나 여성의 속옷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상태로 성폭행했다. 피해여성들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이 과정에서 영웅담을 늘어놓듯 그동안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어떻게 피해여성을 관찰해 왔으며, 그 근거로 특정시각에 무엇을 했고 누구와 만났는지까지 알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몇몇 여성들에겐 휴대폰을 꺼내 성폭행 장면을 촬영한 후 신고하면 유포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김 씨는 왜 이렇게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됐을까. 담당 경찰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범죄가 일종의 복수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그의 사연은 이러했다. 2001년 일본 나이트클럽에서 일했던 김 씨는 업계에선 제법 알아주는 웨이터였다. 그 와중에 한 여성과 교제했지만 사기를 당한 채 거액의 돈을 뜯기고 배신당했다. 그동안 그가 타지에서 모았던 수입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 셈이다. 옛 애인의 배신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던 그는 여성에 대한 강한 불신이 생겼다. 때문에 이후 스스로 세운 복수극이 바로 영등포구 일대 여성들을 노린 성폭행, 절도 범죄였다고 한다.
경찰조사에서 김 씨는 “배신하고 떠난 옛 연인에 대한 응징을 한 것뿐이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어긋난 복수극에 현재 드러난 것만 해도 8명의 여성들이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당했다.
1월 26일 기자와 만난 경찰 형사3팀 관계자는 “김 씨를 조사하면 할수록 그동안 저지른 범죄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며 “전혀 반성의 기미도 없는 데다 피해여성들의 진술대로 죄질이 나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