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이날 대법원의 판결로 벗겨진 것은 조봉암의 누명만이 아니었다. 반세기 동안 그의 가족들을 옭아맸던 ‘주홍글씨’도 함께 벗겨졌다. 기자와 만난 아들 조 씨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지금의 우리 심정을 가늠할 수 없다”며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을까. 조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초라하고도 비참했다. 아버지의 시신은 ‘관 하나도 만들어 주지 말라’는 당시 정권의 지시대로 낡은 흰색 천으로만 덮인 채 트럭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조 씨의 나이는 열 살에 불과했다. “주위 어른들이 아버지 얼굴을 덮은 흰 천을 내리면서 ‘평생 못 볼 테니 마지막으로 보라’고 말하더군요. 아직도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편안하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셨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조 씨는 조봉암 선생이 나이 50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었다. 조봉암은 생전에 아들의 삶이 자신 때문에 피해를 당할까봐 가족들에게 조 씨는 아예 아무것도 모르게 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진보당 사건은 물론이고 이승만 전 대통령 측과의 정치관계, 심지어 사형선고 후에도 아들은 절대 면회를 오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조 씨는 아버지가 옥살이를 하는 1년 동안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사망 후에도 왜 감옥에 가신 것인지, 어떤 혐의 때문인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단지 그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만 직감적으로 느낄 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우제를 지내려는데 산소 주변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온 겁니다. 그런데 경찰들이 산 밑을 지키고 서서 조문 오는 사람들을 막아서서 못 올라가게 했죠. 그런데도 200~300명 남짓한 사람들이 경찰의 눈을 피해 험한 산을 돌아 올라와 아버지를 조문했습니다. 모두 저를 보며 ‘불쌍해서 어쩌니’라며 얼굴을 쓰다듬고 오열하더군요. 그때도 그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할 뿐 영문을 몰랐죠.”
가족들에게도 시련의 세월이 시작됐다. 당시 군사정권이 가족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던 장충동 집을 떠나 금호동으로 이사를 했다. 집에는 간첩임을 표시하는 새끼줄이 둘러쳐졌고, 경찰들이 늘 집 밖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연좌제의 사슬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자유롭게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고 손님이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어떤 날은 학교를 다녀오는데 누군가 ‘간첩의 집’이라고 커다랗게 쓰고 갔더군요. 또 어떤 날은 ‘반민족의 집’이라고 빨갛게 쓰여 있기도 하구요. 아무 죄를 지은 일도 없는데 늘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때 당시 느꼈던 처절한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이상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 씨가 나이를 먹으면서 연좌제의 주홍글씨는 더욱 깊어졌다. 군대 입영 통지서가 날아 왔지만 번번이 정보부에서 입대를 방해했다. 군 부대에 맞지 않는 출신 성분이란 것이 이유였다. 결국 2년을 기다린 끝에 조 씨는 김포의 공수특전단에 입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신원부적격’이란 이유로 광주의 공병대로 보내졌다. 군대에 들어간 후에도 내부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요주의 인물로 감시당하는 기분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취업도 쉽지 않았다. 처음 제약회사에 입사했지만 1년 반 만에 퇴사해야 했다. 이후에도 여러 직장을 전전했지만 뚜렷한 이유없이 해고됐다고 조 씨는 회고했다. 이직이 잦다 보니 거주지를 자주 옮겨야 했지만 그때마다 경찰들이 새로 계약한 집을 먼저 알고 찾아와 ‘왜 이 동네로 이사하냐’며 캐묻곤 했다. 경찰들이 불쑥 찾아 올 때면 그는 전과자가 된 것처럼 신변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했다.
간첩 관련 사건이 터질 때면 중앙정보부에서 가장 먼저 찾는 것도 그였다. 당시 조 씨를 전담하던 정보부 직원은 “지금 상황에서 당신의 정황이 파악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도피할 것처럼 보이면 바로 총으로 쏠 수도 있다”며 간첩 수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조 씨를 조사실에 가둬두기도 했다고 한다.
조 씨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20대 시절 깊은 방황을 겪기도 했다. “외국으로 떠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출국 허가조차 받을 수 없는 신분이더군요. 육십 평생 대한민국을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역시 신원이 불안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결혼 적령기가 돼서도 가정을 꾸릴 수 없었다. 경제적인 문제도 이유였지만 불안한 삶 때문에 그도 결혼에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지인들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1남 1녀를 둔 가장이 되면서 조금씩 생활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직업 문제만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고통스런 삶이 계속되던 중 민주 정권이 들어섰고, 그의 가족들도 희망을 가졌다. 90년대 초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조 씨의 누나는 김영삼 전 대통령 앞으로 탄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재심을 통해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긴 탄원서에 대해 돌아 온 답은 단 한 줄이었다. “그 한 문장은 평생 못 잊을 것 같습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의 비서관은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역사가 판단할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김 전 대통령 때 아예 논외 문제로 치부됐던 과거사 규명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본격화됐다. 그의 가족들은 다시 희망을 붙잡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 문제는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사법부의 판단에 의해 사형된 것이기 때문에 대법원 측의 자기반성 없이는 아버지의 판결을 ‘무죄’라 뒤집을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인내하고 기다린 끝에 52년 만에 재심에 참여한 대법원 판사 전원의 만장일치로 아버지의 혐의를 벗겨냈다. 열 살이었던 조 씨는 어느덧 사망할 당시 아버지 나이가 돼 있었다. 그는 판결이 내려진 날 누나와 산소를 찾아 판결문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그는 “뒤늦게나마 선배들의 판결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한 대법원 판사들의 용기에 감사드린다”며 “아직 우리 사회에는 잘못된 과거사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버지의 무죄 판결이 그 사람들에게 희망의 단초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
‘사법 살인’ 첫 희생양
죽산 조봉암은 광복 후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인물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맞서 제2,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제3대 대선 때는 30%(216만 표)의 높은 지지율을 얻기도 했다. 그는 대선에서 패한 뒤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간첩 양명산으로부터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았다는 등의 혐의를 받고 1958년 기소됐다.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돼 1959년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그러나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당시 간첩 양명산의 진술이 일관성이 결여돼 혐의 사실을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 52년 만에 열린 재심 끝에 무죄로 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