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녀가 10년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리고 모델이 아닌 연극배우부터 자신의 경력을 쌓았더라면, 아마도 로렌 바콜이나 리타 헤이우드 정도의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킴 노박의 전성기인 50년대는 TV의 위세가 등등해지던 시기였고, 과거의 여신들은 점점 스크린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스튜디오는 킴 노박을 ‘금발의 백치 미녀’로 포장했고,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이미지가 굳어지지 않기 위해 저항했다.
킴 노박은 1933년 2월 13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교사였지만, 그녀는 학교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자아가 강한 아이’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 때문에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첫 직장은 지방 백화점의 패션 모델. 이후 잡화점 점원, 엘리베이터 걸, 치과의사 조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녀는, 첫 직장의 경험을 살려 어느 가전제품 회사 모델이 되었다. 그때 그녀의 닉네임은 ‘미스 냉장고’였다.
따분한 인생을 바꾸기 위해 LA로 왔고, 모델 경력을 인정받아 배우가 되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첫 영화는 글래머 스타 제인 러셀 주연의 <프렌치 라인>(1954). ‘계단 위에 서 있는 모델’ 역이었는데, 몇 장면 출연하지 않았지만 관계자의 눈에 들었고 컬럼비아 영화사는 그녀의 가능성만 보고 6개월 계약을 맺었다.
전혀 연기 수업을 받은 경험이 없었기에 카메라 앞에서는 항상 어색했던 그 모습에, 대중들은 오히려 묘한 섹스 어필을 느꼈다. 고전적 아름다움과 세속적이며 화려한 관능미가 결합된 오묘한 매력은, 그녀와 네 편의 영화에서 함께 했던 리처드 퀴니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거실의 숙녀와 침실의 창녀가 결합된 듯한” 독특한 개성이었다.
이후 그녀는 탄탄대로를 달린다. 데뷔 1년 만에 미국 전역으로부터 팬레터 세례를 받았고, 평론가들은 노박이 멍청한 블론드 미인이 아니라 저항적인 여신의 이미지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공연한 <황금 팔을 가진 사나이>(1955)로는 골든글로브 여자신인상을 수상하기도. 이때 만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1958)은 그녀의 ‘불멸의 걸작’이 되었다. 그 어떤 영화보다 성적 매력을 내뿜었던 이 영화에서, 그녀는 1인 2역을 맡아 현기증 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킴 노박은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배우였다. 그녀는 자신의 캐릭터에 우울하면서도 저항적인 이미지를 부여해 관능미를 상쇄시키려 했고, 그 결과 만들어진 냉정함과 관능미의 절묘한 결합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녀를 더욱 관능적인 섹스 심벌로 만들었다.
동시대 배우 중 마릴린 먼로와 비교할 때 그녀의 독보적인 위치는 더욱 두드러진다. 먼로가 마치 금박을 입힌 듯한 화사함과 백치미를 과시했다면, 킴 노박은 훨씬 더 정제된 성적 매력을 지녔다. 그런 점에서 그레타 가르보나 마를렌느 디트리히를 연상시키는 미스터리한 느낌의 소유자였고, 스튜디오의 이미지 메이킹에 맞서 ‘영화 이외의 삶’을 꾸준히 추구했다.
1950년대 중반에 가장 흥행성 높은 배우로 떠올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연기력이 상승하던 1960년대에 그녀는 인기의 하락을 겪는다. 당시는 할리우드에 새로운 스타일의 배우가 휘몰아쳤고, 고전적 스타일을 벗은 그들은 킴 노박을 점점 밀어냈다. 그녀는 클래식 스타 시기의 막차를 탄 여배우였으며 새로운 배우 세대의 등장 때문에 단명한 피해자였다. 이후 그녀는 은퇴와 복귀를 반복하다가, 1991년에 완전히 은퇴해 은둔의 삶을 살았다. 1997년에 베를린영화제에서 <현기증> 복원판 상영이 있었을 때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기 위해 깜짝 나들이를 즐겼지만 이후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올해 78세. 혹시 컴백해 전설적인 모습을 다시 보여줄지, 기대해본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