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빈 주연의 드라마 <시크릿가든>(위) 과 영화 <만추>. |
나비 효과.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어느 지역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이다. 대중문화계에서는 스타가 나비다. 그들의 활동 하나하나에 수십억 원에서 수백억 원이 투입된 작품의 성패가 결정된다.
현빈이 SBS 드라마 <시크릿가든>으로 대박을 터뜨리자 <만추>의 배급을 자처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졸지에 배급사를 구하던 입장에서 고르는 입장이 된 것이다. 불과 한 주 차이로 현빈의 또 다른 영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감독 이윤기)가 개봉된다. 홍보사 앤드크레딧 측은 “원래부터 2월에 개봉할 예정이었다”고 밝혔지만 ‘현빈 특수’를 누리겠다는 계산이 배제됐다고 보기 어렵다.
1년 전에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다. MBC 사극 <선덕여왕>에서 비담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오른 배우 김남길. <선덕여왕>이 끝난 후 불과 4개월 만에 장편 영화 <폭풍전야>가 개봉됐다. 짧은 기간 안에 차기작을 선택해 촬영했을 리 만무하다. <선덕여왕> 출연 전에 이미 촬영을 마친 이 영화는 창고영화가 될 뻔했지만 김남길의 인기로 인해 좋은 시기에 개봉된 셈이다.
2008년 5월에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다. 그룹 쥬얼리 출신 박정아가 주연을 맡은 영화 <날라리 종부전>의 언론시사회를 마친 후 열린 무대인사에는 쥬얼리 멤버들이 총출동했다. <날라리 종부전>은 이미 2년 전에 제작을 마쳤으나 개봉되지 못했던 대표적 ‘창고영화’였다. 당시 쥬얼리가 ‘원 모어 타임’을 발표하고 인기를 얻자 이 시기에 맞춰 급히 상영한 것이다. 극중 나이트클럽 장면에서는 2년 전 촬영을 마쳤음에도 배경음악으로 ‘원 모어 타임’이 깔려 관객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한 영화 제작자는 “공들여 만든 영화를 개봉시키지 못한 제작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콘텐츠의 질보다는 인기에 편승해 작품을 극장에 건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영화 시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꼬집었다.
2008년에는 유독 1년 이상 묵힌 ‘창고영화’들이 대거 방출됐다. 2006년 영화 <괴물>의 성공 이후 영화계로 몰렸던 투자자들이 잇따라 실패를 맛보고 돌아섰기 때문이다. 돈줄이 말라 신작이 만들어지지 않으니 이미 제작된 영화들을 간단히 손본 후 뒤늦게 개봉하는 기현성이 벌어졌다.
하지만 흥행 성적은 처참하다. 2008년 개봉된 <도레미파솔라시도>(주연 장근석·20만·이하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자료), <날라리 종부전>(주연 박정아·3만 1500명), <무림 여대생>(주연 신민아·2만 2000명), <방울토마토>(주연 신구·1만 8000명) 등이 고배를 마셨다.
2009년 개봉됐던 영화 <스위트 드림>(주연 연정훈)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주연 공효진 신민아) 등도 소규모 개봉됐다고 조용히 사라졌다. 지난해 개봉된 김남길의 <폭풍전야> 역시 5만2000명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스코어다. 단순히 배우의 이름값만으로는 흥행을 점칠 수 없다는 사실만 새삼 확인했다.
창고영화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가 낮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영화 홍보사 관계자는 “배급사가 사전 시사를 거친 후 배급을 결정한다. 여기서 통과하지 못하면 표류하다 창고영화가 된다. 시간이 지나고 재편집을 한다고 해도 수준을 크게 끌어올리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창고영화에 큰돈을 쏟지 않는 것도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다. 영화를 알리기 위한 마케팅, 홍보비용이 턱없이 적게 책정되고, 개봉 규모도 작다. 이 관계자는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관객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홍보 활동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재정적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아 영화를 알리기조차 어렵다”고 토로했다.
영화 산업을 모르는 이들은 “왜 촬영을 마친 영화를 상영하지 않냐”고 묻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국내에는 약 2200개의 상영관이 있다. 이중 유명배우를 내세운 국산 상업영화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400~600개 상영관을 가져간다. 굵직한 영화 3편만 있어도 1500개관 정도는 손댈 수 없는 것이다. 매주 평균 5~6편의 영화가 개봉되는 것을 감안하면 중소 영화들은 50개 상영관을 잡기도 버겁다.
배급사 역시 ‘돈 되는 영화’에만 주로 신경 쓴다. 하지만 비난할 수 없는 당연한 자본주의 논리다. 국내 최대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상업영화는 상업논리로 따져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상영관을 배정해도 관객이 찾지 않을 것 같은 영화를 배급할 수는 없다. ‘돈 되는 영화’라기보다는 ‘관객이 선택할 만한 영화’를 배급하는 것이 우선”이라 설명했다.
몇몇 영화들이 개봉을 못하고 창고영화로 전락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인쇄 필름 값도 건지지 못할까 봐’다. 통상 1개 상영관에 걸기 위해 필름 한 벌을 만드는 데 약 200만 원이 든다. 입회비를 포함한 관리비가 10% 정도 추가된다. 필름 한 벌당 약 220만 원이 필요하다고 보면 된다.
100개관을 잡는다면 100개 필름을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은 2억 2000만 원. 관객 한 명당 약 2600원이 제작사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을 감안하면 10만 명을 동원해도 고작 2억 6000만 원을 번다. 필름 비용을 지불하면 손에는 푼돈만 남는다. 관객을 10만 명도 모으지 못한다면 필름 값도 고스란히 적자로 남게 된다. 한 중소영화 제작사 대표는 “창고영화 가운데 10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한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어렵게 개봉해도 손해만 가중되는 셈이다. 이런 상황이니 만들어 놔도 상영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 대표는 이어 “과거에는 소규모로 개봉한 영화에 ‘극장 개봉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비디오나 DVD로 출시해 수익을 냈다. 하지만 현재는 부가판권시장까지 붕괴돼 수익을 낼 길이 막막하다”고 덧붙였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