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에게 아름다운 외모와 글래머러스한 육체는 축복이겠지만 모니카 벨루치에겐 오히려 저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말레나>(2000)는 어쩌면 벨루치의 운명 같은 영화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2차 대전 시기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너무나 아름답기에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받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미모를 팔고 전쟁이 끝나자 파시스트와 친분을 유지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폭행당한다. 그녀의 진심은 들어주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녀의 외모에 가려져 버린 것이다.
모니카 벨루치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도 그녀에게서 지적이거나 감성적인 그 무엇을 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단지 그 ‘육체’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1964년생이니 올해로 47세의 중견 배우가 되었지만 벨루치에 대한 ‘육체의 요구’는 여전하다. 그녀는 굳이 연기하지 않고 ‘존재감’만으로 충분한, 그러기에 끊임없이 오해받고 종종 과소평가되는 배우다.
그녀가 자신의 육체에 대해 말할 때 시니컬한 건 그런 이유다. 스스럼없이 “할리우드에서 보낸 몇 년은 몸을 팔아먹고 산 시간이었다”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말레나>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다신 나오기 힘든 완벽한 8등신”이라며 숭배의 멘트를 날리자 “난 웬만한 여배우보다 훨씬 뚱뚱하고 얼굴도 길다”며 맞받아치기도 했다.
모니카 벨루치처럼 강한 페로몬을 풍기는 배우는 없다. 이탈리아 페루자의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법대에 진학하며 도시로 나왔지만 학비를 벌기 위해 모델 일을 시작한다. 대학을 중퇴하고 직업 모델이 된 그녀는 수많은 명품 브랜드에 휘감겨 화려한 시절을 보냈고, 20대 후반에 뒤늦게 영화계의 눈에 뜨인다.
데뷔 초창기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옷을 벗었다. “나는 누드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그 무엇보다 인간의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철학은 나름 숭고했지만 그녀를 관음적 대상으로 만드는 마초 감독들의 시선은 음험했다. 그녀를 ‘에로 배우’처럼 각인시켰던 <라 피파>(1991)에서 그녀는 부위별로 스캔되었고 <드라큘라>(1992)로 할리우드에 진출했지만 그녀의 이국적 글래머 이미지가 착취되었을 뿐이었다.
이때 만난 <라빠르망>(1996)마저 없었다면 모니카 벨루치는 영원히 ‘육체파’라는 칙칙한 수식어 안에 갇힐 뻔했다. 질 미무니 감독은 벨루치의 풍만함 속에 감춰진 순수한 아름다움을 간파했고 먼 곳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은 강박적인 유혹의 눈빛이었다. 파리지엥이 가장 사랑하는 이탈리안. <라빠르망> 이후 그녀의 수식어였고 이 영화에서 만난 뱅상 카셀과는 이후 부부가 되어 여러 영화에서 호흡을 맞추었다.
<라빠르망> 이후 <말레나>의 말레나, <늑대의 후예들>(2001)의 고급 창녀 실비아, <아스테릭스 2>(2002)의 클레오파트라 등 육체적 이미지를 이용하는 역할을 이어가던 벨루치는 <돌이킬 수 없는>(2002)에서 자신의 육체성을 산산조각 낸다. 지하도에서 처절한 강간과 폭행을 당하는 장면 속의 벨루치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촬영된 그 신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굴레들을 송두리째 거부한다. 관객들은 더 이상 그녀를 ‘머리는 텅 빈 글래머’로 평가하지 않게 된 것. “육체를 소비해서 얻은 행운은 오래가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가진 벨루치는 섹스어필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자유를 얻은 셈이다.
이후 벨루치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의 막달라 마리아처럼 성서 속의 인물이 되든, <매트릭스>시리즈의 페르세포네처럼 사이버 공간의 아이콘이 되든, <그림 형제>(2005)의 거울 여왕처럼 동화 속 캐릭터가 되든, 그 어떤 이미지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여배우가 된다는 건 여성성의 고귀한 승화”라고 당당히 말하는 벨루치는 유럽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다양한 장르에 걸쳐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섹스를 나눈 후 남자는 잠에 빠져 들고 여자는 생각에 빠져든다”는 재치 있는 조크의 주인공인 모니카 벨루치는 ‘섹스’와 ‘육체’ 같은 단어에서 ‘내면’과 ‘영혼’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모든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이었던 여배우는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더욱 넓어질 수 있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